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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비의 경제 : 공통재의 생물학 - 안드레아스 베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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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비의 경제 : 공통재의 생물학 - 안드레아스 베버

은혜 Graco 2016. 4. 3. 22:31

원문 http://wealthofthecommons.org/essay/economy-wastefulness-biology-commons




허비(虛費)의 경제 : 공통재의 생물학

 

 

안드레아스 베버 | 은혜 옮김

 


* 안드레아스 베버(Andreas Weber, 독일)는 생물학자, 철학자, 저술가이다. 사유와 집필의 주요 관심사는 인간의 자기이해와 자연 사이의 관계이다. 베를린과 이탈리아 바레세 리구레에 거주하고 있다.

http://autor-andreas-weber.de/



수십억년간 성공을 거둬온 종획 없는 공통재-경제(all-enclosing commons-economy)가 있다. 바로 생물권이다. 그 생태계는 에너지, 물질, 존재, 관계, 의미로 이루어진 지구 차원의 가계(家計), 이는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경제를 담고 있으며 이것만이 인간의 경제를 존재할 수 있게 한다. 햇빛, 산소, 식수, 기후, 토양, 에너지이는 이 가계의 산물이자 과정이다는 우리 시대의 호모 에코노미쿠스 또한 먹여 살리고 있는데,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모든 기술적· 경제적 진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물권의 산물을 먹고 산다.

 

나는 자연이 뛰어난 공통재 패러다임을 체현하고 있음을 주장하려 한다. 나는 이렇게 정의함으로써 단지 압도적인 시간 동안 인간과 여타의 존재가 공통재 원리에 따라 공생해왔음을 말하는 데 그치려는 것이 아니다. 나의 주장은 더 복잡하다. 나는 자연 속의 생태적 관계들이 공통재의 규칙을 따르고 있다고 확신한다. 이로써 자연은 우리에게 자연적·사회적 생태계로서 의 공통재라는 강력한 방법론을 제공할 수 있다. 이 글의 목표는 이 '실존적인 공통재 생태학' 을 짧게 개괄하는 것이다.



삶에 대한 숨어있는 형이상학으로서의 자유주의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떤 자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가? 자본주의 시장으로서의 자연이라는 자유주의적 은유가 덧씌운 편견 없이 자연이라는 가계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살림이라는 근본적인 생태계 및 경제를 차근차근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특히 생태적 상호작용을 외부적인 법칙(가령 자연선택)의 압박 때문에 기계적인 행위자(또는 '유전자')들 사이에 벌어지는 경쟁 및 최적화 과정으로 보는 주류적 관점을 문제 삼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오히려 더 많은 자유를 향해 진화해온 심도 깊은 역사를 자연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역사의 주인 공들은 상호의존성 속에 연결되어있는 자율적인 주체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현재 생 물학·경제학 이론에서 통용되고 있는 물질 및 정보 교환이라는 관점의 정반대편에 서 있다.


지난 2백년간 자연의 진화 이론과 재화 및 서비스라는 인류의 가계 이론[경제 이론]만큼 서로 강하게 영향을 주고받은 모델은 거의 없다. 이 두 분야는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에서 현재와 같은 형태를 얻었으며 서로의 핵심 은유를 차용하고 적용했다. 그 결과, 사회적 발견들이 자연체계와 과학 지식에 투영되었고 그런 다음 다시 사회경제학 이론들에 적용되었다. 오늘날 이 두 가지 패러다임은 생물경제학적(bioeconomic) 형이상학을 함께 형성하는데, 이 형이상학은 세계에 대한 객관적 서술을 문명 자체에 대한 평가로서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치경제학자 토머스 로버트 맬서스가 근대적인 생물학 개념인 진화 개념의 결정적인 초석을 놓았다는 점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맬서스는 사회의 변화를 설명하는 것으로서 희소성 개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꾸준하게 늘어가는 인구를 감당하기에는 자원이 결코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생물학자인 찰스 다윈은, 빅토리아 시대의 산업 사회를 관찰하면서 나온 것이 분명한 이 이론을 변형하여 자연의 변화·발전에 대한 종합적 이론에 적용했다. 이로써 '생존을 위한 싸움', '경쟁', '성장', '최적화' 같은 개념들은 소리 없이 우리의 자기이해(self-understanding)의 핵심요소가 되었다. 즉 생물학적·기술적·사회적 진보는 개인 이기주 의가 극에 달함으로써 달성되었다고 이해하게 된 것이다. 계속되는 경쟁 속에서 적자(강력한 기업)들은 적소(시장)를 활용하여 자신의 생존율(이윤)을 늘려나가는 반면, 약자(효율성이 떨어 지는 것)는 사멸(파산)한다. 그러나 그 결과로 나타난 경제 및 자연의 형이상학은, 사회가 세 계의 전제에 대해 갖고 있는 견해보다 덜 객관적인 세계상(世界像)이다.


이러한 [자연과학과 경제학 간의] 은유의 교환을 통해 경제학은 더욱더 스스로를 '견고한' 자연과학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경제학은 생물학과 물리학에서 모델을 가져왔고, 결국 호모 에코노미쿠스[각주:1]라는 수학적 개념으로 귀결되었다. 이 키메라항상 자신의 실리를 극대화하고자 하는 기계 같은 이기주의자는 감춰진 그러나 전방위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인간성 모델이 되 었다. 그 그림자는 새로운 심리학적 접근법이나 게임이론 접근법에도 여전히 드리워져 있다. 진화생물학 또한 경제학 모델에서 영감을 얻었다. 예컨대 '이기적 유전자'는 호모 에코노미쿠 스가 생화학에 다시 반영된 것에 다름 아니다.[각주:2]


우리는 생물학과 경제학의 이러한 동맹을 '자연에 대한 경제적 이데올로기'라고 부를 수 있다. 오늘날 이 이데올로기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지배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체화되는 차원(유전자가 조종하는 생존기계로서의 호모 사피엔스)은 물론, 우리의 사회적 측면(실리를 극대화하는 이기주의자로서의 호모 에코노미쿠스) 또한 규정한다. 자연의 영역과 사회 적 영역을 하나로 묶는 '보편적 경쟁'이라는 관념은 항상 대립적이며 배타적이다.[각주:3] 우리는 가능한 한 많은 경쟁자를 제거하고 제일 큰 파이 조각을 쟁취해야 한다. 다른 이의 생명을 빼앗아도 된다는 허가를 받은 셈이다.


그래서 자연을 경쟁 및 최적화라는 경제적 과정으로 재발명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공통재 종획을 위한 형판이 되었다. 이는 강탈과 퇴거가 실제로 일어나기 전에 정당화될 수 있는 맥락을 먼저 만들어놓는 정신적 울타리치기로서 기능했다.


공통재가 사적 소유로 변한 최초의 변형은 근대 초기(1500-1800)에 일어났다. 이 시기는 우리의 자기이해가 점점 프랑스의 사상가 르네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관점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된 시기와 일치한다. 정신은 더 이상 신체와 긴밀하게 얽히지 않고 물질 위에 존재하는 이성적 원리와 얽힌다. 유기체들, 즉 자연의 전체 다양성과 인간의 신체는 주체 없는(subjectless) 결정론적 물질로 만들어진 자동기계장치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신념은 어떠한 형태의 연결도 거부하는 것과 같다.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는 이 생각을 확장시켜 사회와 정치의 자연으로부터의 완전한 분리를 주장했다. 자연은 맹목적인 인과관계의 지배로 간주되며, 따라서 더 이상 인간의 자기이해를 위한 준거점으로서 유효하지 않다.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한때 귀족들이 농민들과 공유했던 숲이 배타적인 소유물이 되어 더 이상 접근·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최적화와 선택이라는 비인간적인 힘이 '순수 사물'(pure things)의 영역을 지배하며 따라서 우리 인간도 지배한다는 생각은, 저 역사적 배제[숲의 사유화]와 상당히 유사하다. 이 둘은 살아있는 풍요에 대한 소외 및 울타리치기라는 기본 모델로 이어진다.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이런 식으로 자연과 분리된 순수한 인간의 영역이 더 많은 자유를 확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다. 오히려 사회는 잔혹하고 무자비한 힘들자연 안에 존재하는 창조적이고 타당한 힘들과의 연결을, 그리고 체현된 주체성과의 연결을 잃어버린 힘들의 전쟁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홉스의 사회 모델은, 자연 객체와의 모든 연결을 피하지 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혹한 힘에 의해 추동되는 세계의 화신이 된다. 이는 '리바이어던', 즉 '자연' 상태로서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라는 생각을 토대로 한다.


한때 만인에게 열려있던 자연에 가해진 종획은 우리의 정신과 감정 깊은 곳까지 닿아있다. 인간 내면의 미개척지가 점점 통제를 당하게 된 것이다. 자신을 발전하고 있는 전체의 체화된 일부로서 이해하기가 어려워졌다. 신체로서의 인간은 더 이상 존재의 영역에 속하지 않게 되 었고, 살아있음에 대한 감정도 더 이상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인간의 경험과 감정은 실재의 나머지 부분으로부터 고립되었다.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 상당히 보편적 이 된 생각, '자연'은 전혀 실재적이지 않으며 다만 정신적 개념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라는 생각에 이르며 존재하지 않는 자연을 돌볼 여지를 두지 않는다. 자연에 대한 경제적 이데올로 기는 우리의 영혼에서 모든 미개척지를 제거했다. 스스로 자신을 성취하며 어떤 존재에 의해 서도 점유되지 않는 종획되지 않은 자연은, 자유주의 정신에게는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었다. 경쟁과 최적화라는 원리를 넘어서는 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이해는, 이제 어떠한 보 편타당함도 주장할 수 없다. 그것은 '그저' 보기 좋은 환영일 뿐이다. 실존을 위한 발버둥의 기저를 이루는 힘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증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사랑은 최 적의 짝을 선택하는 것으로 환원된다. 협력은 본디 자원 경쟁에서 사용되는 책략이며, 예술적 표현은 담론의 경제를 보여줄 뿐이다.


따라서 자연에 가해진 종획은 결국 호모 사케르[각주:4]살과 피로 이루어진 취약한 존재, 감정적이고 살아있으며 벌거벗은 존재에 이른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살아있는 생명과는 별개의 것으로 사고하는 쪽을 택한다면, 우리는 살아있는 것의 영역과 이미 절연한 셈이다. 결과적으로 공통재에 가해진 종획은 생명정치(biopolitics), 즉 생명[]을 소유하고 화폐화하려는 시도로 나타난다.



자연의 반자본주의


우리가 삶을 끝없는 최적화 과정으로 간주하는 주류적인 생물학적 관점에 도전할 수 있다면 새로운 경제가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삶에 대한 새로운 상은 이미 무르익었다. 특히 생물학에서 그렇다. 실제로 생물학에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라는 홉스적 패러다임이 극복되고 있다. 유기적 세계에 대한 생물학적 관점(과 그 속에 있는 인간에 대한 상)적대적 생존기계들의 전장이라는 생각에서 행위자들과 목표 및 의미의 상호작용이라는 생각으로 변하고 있다. 유기체는 외부의 자극과 유전적 영향의 지배를 받는 것자극과 영향이 원인이 되고 자신이 결과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극과 영향을 해석하는 주체로서 그리고 제 한된 경쟁과 '약한 인과성'이라는 조건 하에서 자신의 실존을 타자와 협의하는 주체로서 간주 되기 시작한다.


'생물학적 자유주의'라는 공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변화는, 자유가 펼쳐지는 세계로서의 유기적 세계라는 상을 낳는다. 이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있어 특히 명백하다.

 

1. 효율성 : 생물권은 효율적이지 않다. 온혈동물은 신진대사를 유지하는 데 자신의 에너지의 97% 이상을 소비한다. 광합성은 7%라는 말도 안 되는 효율을 달성한다. 어류, 양서류, 곤충은 수백만 개의 알을 낳지만 그중 살아남는 것은 아주 극소수이다. 자연은 효율이 아니라 풍부함이다. 일어날 수 있는 손실을 믿을 수 없는 '허비'를 통해 상쇄한다. 자연적 과정은 인색함이 아니라 관대함과 허비에 기반을 두고 있다. 생물권은 실로 증여에 기초하고 있지만 상호적이지는 않다. [가령] 모든 생물학적 활동의 토대인 태양에너지는 하늘에서 내리쬐는 선물이.


2. 성장 : 생물권은 성장하지 않는다. 생물자원의 양은 증가하지 않는다. 처리량은 확대되지 않는다. 자연은 정상상태 경제를, 즉 모든 관련 요인들이 서로에 대해 변함없이 충실한 경제를 운영한다. 종의 개수가 반드시 증가하는 것도 아니다. 한 시기에 증가하는가 하면 다른 시 기에 감소한다. 정말로 성장이 일어나는 유일한 차원은 바로 경험의 다양성감정을 느끼는 방식, 표현양식, 외양의 변화, 새로운 패턴과 형태들이다. 따라서 자연은 중량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심도가 깊어지는 것이다.


3. 경쟁 : 오로지 자원을 놓고 벌이는 경쟁을 통해서만 새로운 종이 발생한다는 주장은, 증명 될 수 있었던 적이 없다. 오히려 종은 우연히 태어난다. 종은 예상치 못한 돌연변이를 통해 발전하며, 새로운 공생과 협력을 통해 전체 집단에서 한 집단을 나머지와 분리시킴으로써 (예 컨대 우리의 체세포가 그러하듯이) 발전한다. 경쟁예컨대 한정된 양분[식량]을 둘러싼 경쟁은 생물학적인 천편일률, 즉 상대적으로 극소수인 종이 전체 생태계를 지배하는 것을 낳을 뿐이다.


4. 희소성 : 자연의 기본적인 에너지 자원인 햇빛은 매우 풍부하다. 두 번째로 핵심적인 자원, 즉 생태학적 관계들과 새로운 적소들의 수에는 상한선이 없다. 수많은 종들과 그 종들 간의 다양한 관계는 첨예한 경쟁이나 '적자'의 지배를 낳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의 증식을 가져온 다. 이로써 자유가 증가하는데 이는 곧 상호의존성의 증가이기도 하다. 많은 것이 허비될수록 공통의 부는 더 커진다. 적은 양의 양분을 자유롭게 섭취할 수 있는 열대우림 같은 생태계에 서, 이러한 제한[상호의존성]은 더 많은 적소를 산출하며 이로써 전반적으로 더 높은 다양성을 산출한다. 이것은 공생이 늘어나고 경쟁이 줄어든 것의 결과이다. 생물학적 차원에서 희소성은 배제가 아니라 다양화를 낳는다.

 

5. 소유 : 생물권에는 소유라는 개념이 없다. 개체는 자신의 신체조차도 소유하지 않는다. 체를 이루는 물질은 산소나 이산화탄소로 대체되거나 기타 여러 에너지와 물질이 투입됨으로써 영구히 계속해서 변화한다. 하지만 다른 요소들과의 교감을 통해 가능해지는 것은 신체적 차원만이 아니다. 그것은 상징적인 차원이기도 하다. 언어는 언어를 사용하는 화자들의 공동체에 의해 만들어진다. 어떤 종이 가진 습관은 그것을 공유함으로써 획득된다. 이러한 모든 차원들에서 자연 세계의 미개척지는, 개체가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정체성을 펼치는 데 필수적이다. 따라서 (신체적·사회적/상징적) 개체성은 생물학적이면서도 상징에 기초한 공통재를 통해 나타날 수 있을 뿐이다.



생물권에서 나타나는 공통재의 특질들


온대림이 번성하는 데는 건조한 사막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규칙들이 존재한다. 각각의 생태계는 여러 가지 규칙, 상호작용, 물질의 흐름의 총합이다. 이는 공통의 원리들을 공유하고 있지만 지역마다 독특하다. 이 엄격한 지역성은 살아있는 것들이 자연이 제공하는 공통재를 이용할 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면에서나 관계적인 면에서나 공통재의 일부라는 사실을 전제한다. 개체의 실존은 전체 시스템의 실존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시스템의 특질, 즉 그것의 건강(과 아름다움)은 때때로 타협이 필요한 불안정한 균형에 기초한다. 이는 개체의 너무 큰 자율성과 시스템이 행사하는 필연성의 너무 큰 압박 사이의 균형이다. 번성하는 생태계는 역사적으로, 비상한 정밀함과 높은 수준의 미학적 아름다움을 낳는 균형의 여러 가지 패턴들 을 개발해왔다. 따라서 자연 형태와 자연 존재는 복잡한 사회에서 정교한 균형을 유지하는 해 법으로 경험될 수 있다. 서로 연결되어있는 개체적 실존이 체화한 해법은 살아있는 것들의 저 특별한 아름다움이며, 이것이 인류에게 생의 감각과 소속감을 채워준다.


엄밀한 의미에서 자연은 공통재 패러다임이다. 자연에서는 그 어떤 것도 독점에 종속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오픈소스이다. 유기체 영역의 정수(精髓)는 이기적 유전자가 아니라 모두에게 개방되어있는 유전정보의 소스코드이다. 현재 바이오기업들이 특허를 갖고 있는 유전자조차도 사실 생물학적인 의미에서는 서로 대립하지 않으며 배타적이지 않다. 유전자는 생물학적·경험적 새로움을 제공해줄 뿐이다. DNA는 모두가 그 코드를 사용할 수 있고 수정할 수 있어서 그로부터 가장 유의미한 조합들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에 여러 종들로 갈라져 나갈 수 있었 다. 호모 사피엔스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즉 오픈소스코드를 가지고 놀다가 저절로 발생했다. 인간 게놈의 20%는 창조적으로 재순환되어온 바이러스성 유전자이다. 자연에는 소유가 존재 하지 않듯이 허비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허비의 부산물은 곧 식량이다. 죽음을 맞은 모든 개체는 자신이 햇빛이라는 선물을 통해 존재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자신을 다른 개체들 이 먹을 수 있게끔 선물한다. 손실이 생산성의 전제조건이 되는, 아직 탐구되지 않은 교환 관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생태적 공통재에서 각기 다른 수많은 개체들과 다양한 종들은 서로 여러 가지 관계경쟁과 협력, 동맹과 포식, 생산성과 파괴를 맺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관계들은 하나의 상위 법칙을 따르는데, 그것은 바로 장기적으로 봤을 때 전체 생태계의 생산성을 가능하게 하고 생태계의 자기생산을 방해하지 않는 행위만이 증폭된다는 법칙이다. 개체의 자기실현은 전체의 자기 실현이 가능할 때에만 가능하다. 생태적 자유는 이러한 형태의 필연성을 따른다. 시스템 내의 연결들이 깊으면 깊을수록 개개의 구성원들이 누릴 창조적인 적소는 더 많아진다.



살아있는 것 간의 관계로서의 공통재

  

생태 경제에 대한 철저한 분석은 공통재라는 강력한 방법론을 산출할 수 있다. 자연적 과정들은실존의 체화된 물질적 측면을 다루는 방식을 살아있음(being alive)의 문화로 변형시킬 청사진을 명확히 제시할 수 있다. '공통재'라는 용어는 자연 세계와 사회적·문화적 세계를 이어 주는 요소를 제공한다. 자연의 진정한 특질을 공통재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생물학적 삶은 물론 사회적 삶에 있어 새로운 자기이해의 길을 열어준다.

 

자연이 실제로 공통재라면, 생산적 관계를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공통재의 경제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자기실현은 공통재 시스템에서 가장 잘 달성될 수 있다. 이는 그러한 문화(그리고 가계 또는 시장시스템)가 바로 살아있는 주체들이 공통적인 시스템 안에서 살아 숨쉬고 있음을 각각의 종 특유의 방식으로 체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게 한 깊은 고민들이 생물학에 대한 철저한 분석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그 결과는 생물학주의적(biologistic)이지 않으며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 철저한 분석은 여기서 유기체 영역이 자유의 진화 패러다임이라는 사실을 드러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공통재를 자연의 기본법칙으로 결정한다 해도, 그 기본법칙에서 기인하는 필연성은 결정론적이지 않으며 최적화와 성장이라는 만연한 통념들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공통재라는 기본 관념은 체화된 자유와 그것이 전체와 맺는 관계에 대한 복잡한 이해에 얼마간 근거를 두고 있다. 개체는 자신이 속해 있는 삶/사회적 시스템의 번영을 통해 자기실현의 가능한 선택지를 얻게 된다. 인류 그리고/또는 비인간 행위자들의 공동체를 공통재의 원리에 따라 조직하는 것은 언제나, 공동체의 자유를 증진시킴으로써 개체의 자유가 증가함을 의미한다.(<1> 참조



<표 1> 다양한 가계 운영방식의 실존적 결과들


우리의 이원론적인 문화가 가정하는 것과는 반대로, 실재는 물질(생물물리학, 결정론적 접근)과 문화/사회(비물질, 비결정론적 또는 정신적/기호적 접근)로 나뉘지 않는다. 살아있는 실재는 오히려 그 모든 차원들에서의 자율과 관계 사이의 불안정한 균형에 달려 있다. 각 구성원의 자기실현을 통해 전체의 증가를 위한 규칙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창조적인 과정이다. 이 규칙들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상이하지만, 우리는 그 규칙들을 삶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 규칙들은 오토포이에시스(autopoiesis) 즉 유기체들의 자기창조뿐만 아니라, 륭하게 성취된 인간들 간의 관계에도 유효하다. 다시 말해 번성하는 생태계는 물론 생물권의 가계와 조화를 이루는 [인간 세계의] 경제에도 유효한 것이다. 이 규칙들이 바로 공통재의 법칙이다.


이렇듯 공통재라는 관념은, 자연과 사회/문화 사이에 가정되어있는 대립을 해소하고 통합하는 원리를 낳는다. 이는 생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분리를 소멸시킨다. 공통재에 헌신하는 모든 실존양식에서 우리가 직면할 수밖에 없는 과제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전체의 증가를 위태롭게 만들지 않으면서 개체의 행복(well-being)을 실현하는 것이다. 공통재라는 관념은 여기서 역시 이론의 영역과 적용의 영역을 한데 섞는다. 이론에 대한 성찰은 어떤 분리된 영역에 고립되지 않는다. 이 성찰은 실천으로, 명상, 협력, 제재, 타협, 합의의 의식(儀式)과 그것의 독특함으로, 실재를 경험하는 것에 따르는 부담과 기쁨으로 여지없이 돌아온다. 이것이 공통재의 실천이 바로 삶의 실천으로서 나타나는 지점이다.




  1. 호모 에코노미쿠스 개념에 대해서는 프리데리케 하버만(Friederike Habermann)의 글을 참조하라. (pp. 13-18) [본문으로]
  2. 다음을 참조하라. Dawkins, Richard. 1990. The Selfish Gen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리처드 도킨스, 홍영남 역, 『이기적 유전자』, 을유문화사, 2010.] [본문으로]
  3. 이 용어들에 대한 설명은 실케 헬프리히(Silke Helfrich)의 글을 참조하라. (pp. 61-67) [본문으로]
  4. 다음을 참조하라. Agamben, Giorgio. 1998. Homo sacer: Sovereign Power and Bare Life.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조르조 아감벤, 박진우 역, 『호모 사케르』, 새물결, 200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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