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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그리고 믿음에 관한 세 개의 성경구절 본문

쓰다

<곡성>, 그리고 믿음에 관한 세 개의 성경구절

은혜 Graco 2016. 6. 29. 10:51

* 스포일러는 알아서 주의 :)




<곡성>, 그리고 믿음에 관한 세 개의 성경구절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누가복음 24:37-39)


영화 <곡성>은 위의 성경구절을 제사(題詞)로 삼고 있다. 감독은 이 성경구절을 인용함으로써 <곡성>이 '믿음/의심'에 관한 텍스트임을 밝힌다. <곡성>의 키워드이자 희대의 떡밥인 '현혹' 또한 섣부른 믿음에 대한 경계를 주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누가복음 24장은 예수의 부활 이후를 다루고 있는데, 이 제사는 부활한 예수가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는 장면이다. 여기서 예수는 자신을 귀신("영")이라 생각하는 두 사람에게 손과 발을 보여주고 그래도 믿지 못하자 음식(생선!)까지 먹어 보인다. 이처럼 예수는 자신이 귀신이 아님을, 즉 엄연히 살과 뼈를 가진 '산 사람'임을 믿게 하고자 감각경험을 그 근거로서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누가복음 24장 39절 이후의 내용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의 승천이다. 예수는 산 사람으로서의 생애를 죽음이 아닌 승천이라는 방식으로 마감하면서, 자신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한 증인들에게 그들이 목격한 바를 믿을 것과 전파할 것을 당부한다. 이를 기점으로 성경의 서사는 성부와 성자의 시대에서 성령의 시대로 옮아간다. 이제 인간의 몸을 한 예수를 직접 보고 듣고 만짐으로써 믿는 감각경험의 시대는 가고, 증언(간증)을 통해 믿음이 전파되는 시대(사도의 시대)가 도래한다. 


달리 말해, 인간 예수의 동시대인들은 믿지 않으려 해도 믿을 수밖에 없는 경험의 시대를 살았다면, 예수 승천 이후의 인류는 믿음의 전파가 믿음을 낳는 이념의 시대를 살았다. 이로써 믿음은 결과(경험상 진실이어서 믿는 것)가 아니라 과정 또는 행위(믿음으로써 진실이 되는 것)가 되고, '이다/아니다'의 문제에서 '옳다/그르다'의 문제가 된다. 믿음이 결정의 문제로, 즉 윤리의 영역으로 도약하는 순간이다. 그래서 한 익명의 사도는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예수를 증언만으로 믿어야 하는, 그리고 믿기로 한 자신의 결정을 다시 전파해야 하는 성도들을 독려하고자 편지를 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브리서 11:1-3)


영화 <곡성>의 큰 줄기는 이러한 ‘믿음 패러다임의 이행’이다. 다만 하나의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패러다임--감각경험에 기반한 믿음과 감각경험을 초월한 믿음--이 영화의 클라이맥스 직전까지 각축을 벌이고 있다. 이러한 각축은 종구와 종구의 후배가 사건을 대하는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영화 초반, 마을에 괴이한 사건이 터지자 종구의 후배는 종구에게 외지인을 둘러싼 흉흉한 소문을 알려준다. 그때만 해도 종구의 후배는 꽤나 진지하고 적극적인 태도로 소문이 진실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종구는 그런 그에게 면박을 준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둘의 태도가 정확히 반대로 뒤집힌다. 사건을 파헤치면서 외지인과의 연결고리가 점점 도드라지는 데다, 결정적으로는 효진이 외지인과 접촉했고 공교롭게도 그 후에 이상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배를 구박하던 종구가 확인되지 않은 소문에 푹 빠지게 되고, 처음에 적극적으로 소문을 설파하던 후배는 '그냥 한 말'이었다며 종구를 말린다. 


두 가지 믿음 패러다임의 대결은 다른 인물의 입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사건을 해결하려 할수록 혼돈에 빠져 아무것도 믿을 수 없게 된 종구는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성당 신부를 찾아가지만, 신부는 종구에게 '다 소문일 뿐 눈으로 본 적이 없지 않느냐'고 되묻고는 교회에서는 해줄 일이 없다며 그를 돌려보낸다. 종구와 동행하며 뭔가를 감지한 부제 이삼은 신부와 달리 행동에 나서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넌 이미 내가 악마라 믿고 있지 않냐'는 외지인의 물음이다. 이로써 ‘네 입으로 진실을 실토하면 그대로 믿어주겠다’는 이삼의 태도는 웃음거리로 전락한다. 


섣부른 믿음을 갖지 않기 위해 혹은 틀린 결정을 내리지 않기 위해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이들의 태도는 다른 ‘이성적’인 내러티브에서라면 냉철한 행동으로서 긍정적으로 다뤄질 법한 것이지만, <곡성>에서는 한없이 어리석고 우스운 것으로 제시된다. 이런 의미에서 <곡성>은 아주 사악한 텍스트다. 등장인물들(그리고 그들과 함께 진실을 추적하는 관객들)이, 마치 감독이 혼자 양쪽을 왔다갔다 하며 두는 장기판에서 놀아나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교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 전에, 감독이 짜놓은 판 자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결과론’이라는 판이다. 


다시 성경을 관통하는 믿음 패러다임으로 돌아가보자. <곡성>에서 감각경험에 기반한 믿음은 사실 애초부터 힘을 받을 수가 없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자체가 이미 인간의 경험치를 넘어서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아무리 과학적으로 혹은 이성적으로 꿰려 해도 꿰어지지가 않는다. 그저 ‘과학적/이성적이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결정과 행동이 지체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은 순간순간 감각경험을 초월한 믿음으로 조금씩 이동한다. 그러나 방향을 튼 후에도 그들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한다. 애초에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이동이 아니라 믿을 거리가 없어서 떠밀린 것인 데다, 근거도 희박한데 ‘틀린 결정이면 어떡하지’라는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겹쳐져 얼어붙고 마는 것이다. 부활한 예수가 주문하는 “보고 나인줄 알라”는 믿음도, 사도들이 주문하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로서의 믿음도 결과론이라는 감옥 안에서는 무력하기 짝이 없다. 


이런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결과론과 무관한 믿음’ 즉 결과에 따라 좋은/나쁜 믿음, 옳은/그른 결정으로 결론 나는 믿음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 관철되는 믿음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야고보서 2:17-19)


개인적으로 <곡성>에서 가장 좋았던 대목은 종구가 효진의 충격적인 변화에 외지인이 연루되어있음을 알고서 그의 집을 재차 방문했을 때이다. 영화 내내 영 소심하고 투미하던 '간이 지 좆만한' 종구가 제대로 눈이 돌아서 외지인에게 맞서는 장면인데, 그 중 백미는 외지인의 개를 제압한 것(말이 좋아 제압이지 사실상 매우 잔인하게 두들겨 패서 죽인 것)이다. 종구의 악다구니를 이상하리만치 가만히 듣기만 하는 외지인 대신 그의 무시무시한 개가 종구에게 돌진한다. 딸 때문에 눈에 뵈는 게 없던 종구가 위기를 맞는 순간이다. 그러나 종구의 광기가 외지인의 개를 압도했고, 그 모습은 처음에는 청각(몽둥이를 내려치는 소리와 개의 단말마)으로, 다음에는 시각(널부러진 개의 시체와 비틀비틀 방 밖으로 걸어나오는 종구)으로 강렬하게 구현된다.      


그러나 종구의 행동력이 이렇게 강렬하게 발휘되는 것은 이 장면뿐이다. 영화 내내 종구가 보이는 태도는 갈팡질팡, 우왕좌왕이다. 앞서 언급했던 종구와 이삼의 ‘신중함’은 사실 냉철함에서 기인한 것이라기보다는 안일함에서 비롯된 것에 가깝다. (그래서 웃음거리가 된 것이다.) 영화 속에서 그들은 제대로 끝장내기보다 일단락에 만족하는 태도로, ‘아니게 만드는 것’보다 ‘아니길 바라는 것’에 익숙한 모습으로 일관한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다다르면 눈곱만큼 남아있던 종구의 행동력은 그마저도 일광과 무명 사이에 갇혀 급속히 냉각된다. 피아식별이 안 되는 상황에서 종구는 극도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발이 땅에 박힌 듯 옴짝달싹하지 못한다.  


망설이던 종구는 무명을 등지고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결과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결과적으로 종구는 집에 가지 말고 무명의 곁에 남아있었어야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결과적으로’ 그렇다. ‘종구가 집으로 돌아갔고 일가족이 파국을 맞았다’는 현상이, ‘무명을 믿으면 해피엔딩이 보장된다’는 가설의 증명은 되지 못한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무명은 어떤 것도 보장해주지 않는다. 자신이 인도하는 대로 따르면 가족 모두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건지, 아니면 다 죽고 종구만 목숨을 건질 수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종구가 집으로 돌아가는 쪽을 택했기 때문에, ‘무명을 믿었을 경우의 결과’는 영원히 미지의 것으로 남는다.


이렇게 감독이 짜놓은 결과론이라는 판은, 얼마나 많은 믿음들이 결과에 좌지우지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위태롭고 허약하기 짝이 없는지를 시사한다. 그것이 위태롭고 허약한 이유는 인간이란 존재가 본디 의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원하는 결과가 도래하지 않을 때에 밀려드는 원망과 배신감 때문이다. ‘나는 믿었는데, 믿음을 가졌는데,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라거나 ‘믿으려고 했는데, 조금만 더 날 설득해주지 그랬어’라고 아무리 발악을 해도, 돌아오는 것은 ‘네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야’, ‘결과가 그걸 보여주지’라는 가혹한 대답뿐이다. 이것이 결과론이라는 감옥의 실체다. 그렇다면 우리의 불쌍한 주인공 종구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은 없다.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다. 확실한 것은 결과론에서 자유로운 믿음, 행동으로써 관철되는 믿음에는 배신(背信)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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