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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 1만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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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 1만원

은혜 Graco 2016. 7. 4. 00:31

3년 전(2013년 6월 25일)에는 이런 글도 썼었다. 그리고 3년이 흐른 지금은...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469&aid=0000150638




최저임금 1만원



6월 27일은 최저임금 의결 법정시한이다. 법정시한을 일주일가량 남겨둔 지난 21일 4차 전원회의가 열렸지만 결렬되었다. 사용자측은 동결을, 노동자측은 5,910원 안을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2014년 최저임금 논의구도는 4,860원 대 5,910원의 대결로 요약되는 것일까. 아니다. 이것은 그저 최저임금위원회 회의실 안의 풍경일 뿐이다. 최저임금위원회 건물 앞에서는 6월 8일부터 최저임금 1만원 쟁취를 위한 농성이 이어져오고 있다. 그리고 24일에는 최저임금 논의가 이루어질 때마다 동결 또는 소폭인상의 근거로 호출되어온 영세상인들(‘최저임금 인상하면 영세상인 다 죽는다’)이 보란 듯이 최저임금 인상촉구에 목소리를 보탰다. 여러 이슈들에 밀려 잠잠한 듯 보이지만 최저임금을 둘러싼 인터넷 여론 역시 여전히 뜨겁다. 수많은 댓글들 속에는, 최저임금 1만원을 주장하는 이들을 ‘불한당’이나 ‘떼쟁이’로 매도하는 의견과 ‘솔까말 1만원’, ‘하다못해 7천원’은 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의견이 공존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접근법은 최저임금에 대한 사회적 통념의 현 주소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자, 가장 먼저 응답되어야할 질문들이다. 먼저 ‘우리’는 불한당이 아니다. 우리, 즉 최저임금 1만원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불한당으로 매도하는 사람들은 모두 불한당이 아니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남을 수탈하는 무리(不汗黨)는, 바로 ‘저들’ 즉 천지분간 못하고 동결안을 고수하고 있는 경총이다. 그들이 사회로부터 부를 수탈하여 축적하는 방식은 마치 지주(임대인)들의 그것과 같다. 부를 생산하는 사람들(상인의 영업노력, 그리고 손님들의 왕래와 입소문)은 따로 있는데, 건물주라는 이유만으로 지대(월세)를 취할 뿐만 아니라 장사가 잘 돼서 지역 땅값이 오르면 혼자서 고스란히 폭리를 취하는 것 말이다. 경총의 저 뻔뻔한 동결안은, ‘월세를 올려주든가, 아니면 나가라’는 지주들의 횡포처럼 ‘이거라도 받고, 싫으면 나가라’는 식이다. 대체 어디로 나가라는 것일까. 저들의 말대로 튕겨져 나가버리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가계부채와 자살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튕겨져 나가는 출구가 아니라 돌파해 나가는 출구를 만들어야한다. 그것이 바로 최저임금 1만원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외관상 찬성과 반대로 팽팽하게 대립하는 것 같은 이 두 가지 접근법이 공유하고 있는 지반이다. 그것은 바로 ‘실현가능성’이라는 문제이다. 최저임금 1만원을 헛소리로 여기며 반대하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1만원은 돼야지라고 찬성하는 사람들도 그 실현가능성에는 고개를 갸웃한다. 그래서 항상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하다못해 7천원이라도’ 같은 양보적인 표현이 덧붙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왜 이토록 끊임없이 한발 물러서고 조심하는가. 정말로 최저임금 1만원은 실현불가능한가.


우리의 일상에서 사용되는 화법을 돌이켜보건대, ‘할 수 없다’는 말은 대부분 ‘하기 싫다’의 다른 표현이다. 최저임금 문제도 그와 다르지 않다. 신자유주의화 과정 속에서 기형적으로 늘어난 투기불로소득을 사회의 것으로 거두어들이면 최저임금 1만원뿐만 아니라 초보적인 수준의 기본소득까지도 지급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여러 연구에서 확인된 바 있다. 그리고 설령 재원이 없다하더라도, 경기침체․만성실업․가계부채급증과 같은 작금의 상황 속에서 국가와 사용자들은 내수 진작의 열쇠인 가계에 투자해야한다. 고수익 고위험 금융파생상품이 아니라 생산자이자 소비자인 가계, 즉 노동자에게 말이다.


최저임금 1만원이 갖는 의의는 단순히 ‘한 시간만 일하면 1만원이 지갑에 들어온다’는 사태에 그치지 않는다. 그동안 임금의 하향평준화 기제로서 작동했던 하방경계선으로서의 최저임금 개념을 혁신한다는 데 더 큰 의의가 있다. 최저임금은 더 이상 최저임금 미만의 노동조건으로부터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소극적인 제도가 아니라, 사회적 생산에의 참여를 방해하는 온갖 불안정성으로부터 사회구성원 모두를 방어하는 적극적인 제도로 탈바꿈해야한다. 따라서 최저임금은 죽지 못해 사는 수준이 아니라, 여유롭고 존엄한 삶을 보장하는 수준이 되어야한다. 그 시작은 최저임금 1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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