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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임금에서 소득으로, 소유에서 접근으로 : 기본소득과 제3기본공통재의 상승작용 본문

쟁이다

[발표] 임금에서 소득으로, 소유에서 접근으로 : 기본소득과 제3기본공통재의 상승작용

은혜 Graco 2016. 8. 18. 14:09
현행의 기본소득 제안에 그치지 않고 거듭 새로운 기본소득




임금에서 소득으로, 소유에서 접근으로 기본소득과 제3기본공통재의 상승작용




은혜 @ BIEN 2016


 


  나는 왜 기본소득에 대해 고민하는가? 왜 기본소득 너머를 상상하려고 애쓰는가? ‘조건(심사와 노동 요구) 없이 모든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지급하는 소득’이라는 아이디어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상당한 사회적 의의를 갖는다. 바로 노동가치론으로부터의 일정 정도의 해방과 그에 따른 시간의 자율1)이다. 그러니 상상력을 더 펼치는 건 잠시 미뤄두고 일단 관철시키는 데 집중해야하는 것 아닌가?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늘어놓기보다는 실현가능한 시나리오를 선택하여 도입하는, 좀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노력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솔직히 가끔은 ‘됐고, 한 달에 오십만 원이라도 일단 내놔봐’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실현된다고 했을 때 곧바로 몇 가지 질문이 이어진다.

  그 중 하나는 ‘누가 받게 되는가’이다. 당장 한국에서 기본소득이 시행된다고 했을 때, 나에게는 그다지 결격사유가 없다. 그러나 한국 사회를 분명 함께 일구어나가고 있지만 한국 국적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이주민들 특히 ‘불법체류자’로 부당하게 불리고 있는 불안정이주노동자들과 노숙인이나 주민등록말소자 등 소위 ‘신원불상자’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 또 다른 질문은 ‘무엇을 받게 되는가’이다. 매달 오십만 원이든 백만 원이든, 현금을 지급받는 것으로 충분히 양질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가? 물론 삶의 질이 이전보다 나아질 것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그런데 구매력을 갖추는 것―이는 주류경제학 식으로 말하자면 ‘유효수요의 창출’이며 개념적으로는 결국 ‘소유’라는 범주에 갇혀있다―보다 더욱 발본적인 직접적 재전유를 상상할 수는 없는 건가?

  전자는 시민권의 재설정이 동반되는 문제다. 그래서 여기에는 기본소득의 가장 큰 장애물인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라는 케케묵은 통념 외에도 인종과 민족이라는 또 다른 거대한 장애물이 존재한다. 그러나 후자 역시 못지않게 까다로운 문제다. 이는 노동에 대한 통념과 함께 깊게 뿌리박혀 있는 사적 소유라는 관념에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기본소득을 둘러싼 두 가지 난제 중 후자의 문제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공공성의 확장 : 이미 공통적이나 아직 사적인 것의 재전유

  

  이 직접적 재전유에 대한 주장은 어쩌면 그다지 새롭게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 기본소득 한국네트워크(BIKN)가 정의하고 있듯이, 기본소득은 현금만 던져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교육, 의료, 주거, 보육, 노후 등의 보편 복지와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2) 󰡔기본소득입문󰡕의 저자 야마모리 도루 역시 공유지에서 유래한 공통재(commons) 개념을 “사회적인 것의 새로운 형태”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적극 수용하고 이를 기본소득(basic income)에 빗대어 기본공통재(basic commons)라 부른다. 이때 기본공통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공공공간(교통‧주거‧녹지 등)의 형태를 띠고 다른 하나는 공공서비스(가사‧육아‧돌봄 등의 사회화)의 형태를 띤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 기본공통재라는 개념을 빌어 ‘화폐 형태 이외의 기본소득’을 범주화하고 그것의 ‘직접적 재전유’를 주장하는 것은, BIKN이 말하는 보편복지와 야마모리가 말하는 기본공통재가 기존의 ‘공공성’이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조직된 대중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대응으로 제출된 자본의 위기 타개책으로서의 ‘복지’와 이 복지로부터 배제되었던 비보장 노동자들의 요구(“가사노동에 임금을”) 등, 과거 선배들의 투쟁을 통해 획득되고 확장된 공공성의 모습에 머물러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물론 그조차도 여전히 미완으로 남아있고 신자유주의의 공세로 인해 점점 더 쪼그라들고 있는 형국―특히 한국사회는 서구나 가까운 일본과 달리, 권위주의 정부가 주도한 압축적인 경제성장으로 인해 복지국가체제를 겪지 못하고 곧바로 신자유주의체제를 맞이했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상상력과 주장을 축소하거나 유예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생산양식이 삶정치적(biopolitical)인 것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4) 요컨대 삶정치적 생산이 싹을 틔웠을 뿐만 아니라 만개해있는 오늘날에는, 그것이 징후 또는 맹아로서만 존재했던 6~70년대에 터져 나온 요구들과는 다른, 그보다 더 나아간 요구들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 글의 문제의식이다.  

  또한 이것은 운동의 이니셔티브의 문제이기도 하다. 최근 스위스 국민투표 과정에서 확인되었듯이, 기본소득에 대한 입장은 기존의 정치지형을 수직선(좌파/우파)이 아니라 사선으로 갈라놓았다. 기본소득에 무조건 반발할 것 같았던 우파 중 일부가 기본소득과 복지정책의 맞교환을 꿈꾸며 찬성하는가 하면, 기본소득을 무조건 지지할 줄 알았던 좌파 중 일부는 정확히 같은 이유로 기존의 사회안전망이 축소‧파괴될 것을 우려하며 반대를 표명했다. 이리하여 좌파진영은 의도치 않게 양자택일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우파 시나리오가 실현되는 것을 최대한 방어(혹은 최소한만 양보)하면서 기본소득을 관철시키거나, 우파의 역습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기본소득을 등지거나. 이처럼 기본소득이 더 이상 좌파진영의 전매특허가 아니게 된 이상, 그리고 현실적으로 도입을 위해 우파진영과의 협상을 거칠 수밖에 없는 한, ‘잃을 것’이 아니라 ‘새롭게 얻어낼 것’에 집중하는 작업이 전략적으로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 ‘새롭게 얻어낼 것’으로서 조명하고자 하는 제3기본공통재의 재전유는 공공성의 영역에 포함되어있지 않은, 아직은 사적인 것으로 분류되고 있지만 더할 나위 없이 공통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들의 직접적 재전유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직접적 재전유를 기본소득과 함께 모색하는 과정은 기존의 사적 영역/공적 영역의 구분을 조금씩 무너뜨려나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즉 기본소득이 임금에서 소득으로의 이행을 자극한다면, 제3기본공통재의 재전유는 소유에서 접근으로의 이행을 촉발하는 것이다.


  

  제3기본공통재 : 디지털 네트워크 및 컨텐츠


  그렇다면 오늘날 생산이 공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사적 소유로 묶여있는 생산물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재전유해야 하는가? 무엇을 공공성의 영역에 새로이 포함시켜야하는가? 나는 (1)공간의 사회화와 (2)공공서비스 확충을 두 축으로 하는 기본공통재라는 구상에 디지털 네트워크 및 컨텐츠라는 제3의 기본공통재를 추가하고자 하며, 이 중 디지털 네트워크를 둘로 나누어 하드 네트워크와 소프트 네트워크로 칭하고자 한다. 하드 네트워크는 3G/LTE 망, 와이파이, 방송전파 등 물리적인 통신 인프라를, 소프트 네트워크는 그 속에서 형성된 온라인 커뮤니티, 앱스토어 등 컨텐츠 유통망(또는 ‘플랫폼’)을 가리킨다. 그리고 컨텐츠는 그 네트워크를 채우면서 흘러 다니는 지식‧정보‧정동‧아이디어 등과 그것이 구체적으로 현실화된 생산물(글, 이미지, 영화, 음악 등)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조작적 정의일 뿐, 네트워크와 컨텐츠는 사실상 분리불가능한 방식으로 상호작용하고 있다. 가령 컨텐츠 유통망의 경우 네트워크로 분류해두긴 했지만 네트워크이면서 그 자체로 컨텐츠의 성격을 갖고 있어 구분이 모호하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디지털 네트워크 및 컨텐츠를 한데 묶어 제3기본공통재로 부르고자 하는데, 결국 이것의 본령은 하트와 네그리가 말하는 공통적인 것의 인공적인 형태에 다름 아니다.5)

  네트워크 및 컨텐츠를 공통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그것의 재전유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 특성 때문이다. 첫째, 네트워크 및 컨텐츠는 디지털화가 가능한 비물질적 생산물이다. 그래서 유통과 공유가 용이하며, 소수가 독점하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다. 접속자가 한 명뿐인 와이파이, 유저가 한 명뿐인 앱스토어, 다운로드한 사람이 한 명뿐인 음원, 시청자가 한 명뿐인 방송프로그램을 상상해보라. 이런 상상이 터무니없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네트워크 및 컨텐츠가 그것에 접속하는 모든 사람―고전적인 의미의 생산자/소비자를 불문하고―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접속자들이 그 생산의 기반으로서 기여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물론 현상적으로는 값을 지불함으로써 손에 넣을 수 있는 하나의 품목으로 우리 앞에 존재하고 있지만, 이러한 배타성은 우리의 통념과 법적 장치를 통해 인위적으로 유지되는 것일 뿐 생산물 자체가 갖고 있는 필연적인 성격이 아니다. 필연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생산물의 존립과 모순된다. 모든 생산물이 그러하듯 사용되지 않으면 그 존재의 의미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자본은 저작권이 침해당하는 것을 최악의 경우로 상정하고 호들갑을 떨지만, 그보다 더 최악의 상황은 생산물이 사장되는 것임을 어느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매력을 어필하고 주목효과를 높이고자 프로모션에 사활을 거는 것이다.

  둘째, 네트워크 및 컨텐츠는 삶정치적 생산물이다. 네트워크 및 컨텐츠는 본성상 배타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배타적이지 않을수록 즉 개방적으로 공유될수록 더 큰 유용성을 발휘한다. 이는 네트워크 및 컨텐츠 생산이 사회적 관계(더 넓게 표현하자면 사회적 삶)를 재료와 수단으로 삼기 때문이며, 이렇게 생산된 네트워크 및 컨텐츠가 다시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네트워크 및 컨텐츠에 담겨 있는 지식‧정보‧정동‧아이디어‧이미지‧코드 등은 모두 기존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창출된 것이며, 이렇게 창출된 지식‧정보‧정동‧아이디어‧이미지‧코드 등은 또 다시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낸다. 이런 의미에서 네트워크 및 컨텐츠 생산은 삶정치적인 생산이다.

  디지털 네트워크 및 컨텐츠 생산의 삶정치적 성격은 그것을 제3기본공통재로서 요구하는 데 있어, 즉 그것의 공공성(공통적인 것으로서 성격)을 주장하는 데 있어 결정적이다. 디지털 네트워크 및 컨텐츠를 더 이상 개인적인 유희나 기호의 영역에 가둬두지 않고 의료‧교통‧교육‧돌봄만큼이나 사회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디지털 네트워크 및 컨텐츠가 사회적(공통적)이라 함은, 그것이 사회적 생존을 위한 필수품일 뿐만 아니라 삶정치적 생산을 가능하게 하고 그 생산성을 좌우하는 주요 생산수단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창작자들에게 기본소득을, 사용자들에게 기본공통재를  


  지금까지의 논의는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사회를 구성하는 모두가 무상으로 누릴 수 있는/누려야 마땅한 기본공통재라는 범주에 디지털 네트워크 및 컨텐츠를 포함시키는 것이 삶정치적 생산이라는 오늘날의 생산양식에 적실하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반드시 덧붙여져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자본-창작자-사용자의 관계를 다시 세우기 위한 모색이다. 이는 사용자와 창작자가 대자본과 국가(법체계)를 경유해야만 서로 만날 수 있는 현행의 구조 속에서 개인의 일탈 또는 범죄로 치부되고 있는 해적행위의 딜레마6)를 건드린다.

  이 딜레마는 사실 너무나 허약한 구조 위에 서있다. 그것은 뮤지션 단편선이 지적한 대로, 저작권 담론의 지형이 “음원을 상품-콘텐츠화 시켜 수익을 내려한 거대 자본들과 분산되어 개별적으로 음악을 다운로드한 개별 사용자들”7)의 대립 양상으로 구축되어왔으며 거기서 창작자는 자본에 의해 대의되거나(메인스트림) 배제되어왔기(언더그라운드)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사용자들이 대자본과 국가가 계도하는 대로 저작권을 보호하는 선진문화시민(이른바 ‘굿 다운로더’)으로 거듭난다 하더라도 대다수 기층의 컨텐츠 창작자들에게 돌아가는 보상은 미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공정하고도 기만적인 구조에 대한 저항이 2011년을 전후로 문화예술계에서, 특히 음악계에서 활발하게 터져 나왔다. 이러한 흐름에는 2010년 철거농성장 두리반에서 결성된 <자립음악생산조합>8), 2012년 예술인들의 느슨하고 개방적인 사회적 조합을 만들기 위해 발족한 <예술인소셜유니온 준비위원회>9), 역시 2012년부터 조직되기 시작한 음악인노동조합 <뮤지션유니온(준)>10), 2014년 불합리한 음원유통 및 수익배분 구조를 바꾸기 위해 출범한 <바른음원협동조합>11) 등이 있다.12) 이들의 움직임은 오늘날 삶정치적 생산을 강도 있게 담당하고 있는 예술인들의 열악한 처지를 보여주며, 또한 자본과 법이 강요하고 있는 ‘합리적’ 또는 ‘양심적’ 유통 및 소비가 정작 창작자들에게는 결코 합리적이지도 양심적이지도 않았음을 보여준다.13)

  이러한 상황에서 사용자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정당하게’ 구매해서 자본의 배를 불리거나, ‘어둠의 경로’로 매우 저렴하게 구매하면서 창작자들이 배를 곯는 상황을 방관하거나. 여기서 우리는 이 두 가지 길을 모두 거부하고 완전히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정말로 비합리적이고 비양심적인 것은 대자본(대기업 제작‧유통 체인망과 고액투자자)을 중심으로 짜여진 현행의 창작물 유통구조이므로, 이것을 끝장내기 위해서는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인 창작자-사용자의 직접적이고도 수평적인 연대를 새로운 유통구조로서 구축해야하며 기본소득과 제3기본공통재의 상승작용을 통해 이를 강화해나가야 한다.

  음악계를 중심으로 문화예술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러한 실험들은 단지 ‘공정한 소비’나 ‘분배 정의’를 정착시키는 데 국한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현대 사회에서 창작자가 점하는 위치 및 역할과 그에 따른 정치적 함의 등, 주체성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가령, <예술인소셜유니온(준)>은 “예술인들이 하는 일은 불특정 다수를 위한 일, 혹은 다음 세대를 위한 일이 될 수 있”으며 “예술의 사회적 기여로부터 자유로운 사회 구성원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노동으로서의 예술, 예술인의 노동자성 등 ‘좋아서 하는 일’, ‘가난을 감수해야하는 일’로 여겨지고 있는 예술창작활동을 생산활동으로 재평가하려는 이러한 노력은 이 운동과 기본소득의 결합이 그리 멀지 않음을 보여준다. 또한 “예술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비정규 노동자, 여성 노동자, 청년 노동자들의 현실이기도 하다”는 인식과 “앞으로의 노동형태는 현 체제로는 ‘근로자’로 포함되지 않는 형태가 많아질 것”이며 “유니온을 통해서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내면 비정규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선례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은, 삶정치적 생산의 헤게모니에 대한 직관―오늘날의 경제에 큰 중요성을 갖는 생산활동들이 노동시간이나 고용관계 같은 기존의 근대적 틀을 초과하여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14) 

  또 다른 예로 <자립음악생산조합>이 공유하고 있는 지향점을 살펴보자. 이들은 음악이라는 분야에 한정되어있는 소규모 생활협동조합이지만, 공연이나 강좌 같은 조합 자체 프로그램을 계속 진행하는 동시에 음악으로써 각종 투쟁현장에 연대하고 대규모 인디음악 축제를 주관하는 등 여러 가지 실험들을 강단 있게 펼쳐나가고 있다. 이들은 “작은 규모의 음악생산자들이 자유롭게 음반과 공연 등 음악과 관련된 작업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데 가장 적합한 환경을 제공하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음악생산의 인프라를 구축해나가는 것을 1차적인 목표로 하”며, “자본과 국가 내지는 행정기관의 간섭을 가능한 줄이고, 소규모 생산자들이 연대하여 스스로가 활동할 수 있는 장(field)을 구축한/구축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그리고 음악생산의 범위를 “창작하는 순간뿐만 아니라 창작한 음악을 즐기고 반응하는” 것으로까지 확대하여 생산자 및 조합원을 폭넓게 규정하고 있다.15) 

  <예술인소셜유니온(준)>과 <자립음악생산조합>은 일견 다른 방향성을 갖고 있는 듯하다. <예술인소셜유니온(준)>은 ‘권리 찾기’에 초점을 두고 있는 반면, <자립음악생산조합>은 모든 간섭으로부터의 ‘자립’을 꿈꾸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상호배타적인 차이가 아니라 접속가능한 차이다. <예술인소셜유니온(준)>의 ‘권리 찾기’는 예술인을 비롯하여 모든 프레카리아트의 권리 찾기로까지 열려 있으며, <자립음악생산조합>의 ‘자립’에는 창작과 공연부터 청취와 관람까지 음악을 둘러싼 모든 상호작용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험들이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즉 기본소득을 통해 생존과 실험을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가운데 ‘생산활동으로서의 예술창작활동이 사회적 관계와 그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마주침들 속에서 촉발되고 진행되는 것이기에 온전히 창작자 개인 혹은 집단의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16)는 논의로까지 발전한다면, 기본소득과 함께 네트워크 및 컨텐츠를 제3기본공통재로 쟁취하게 되는 날이 조금 더 앞당겨질 것이다.



  전국의 접속자여 단결하라!


  이상은 이 글에서 제시한 제3기본공통재라는 프레임에서 ‘소프트 네트워크’와 ‘컨텐츠’에 초점을 맞춘 논의였다. 기본소득은 창작자의 생물학적 삶과 창작활동을 지속가능하게 만들고, 기본공통재로서 주어지는 소프트 네트워크 및 컨텐츠는 사용자의 사회문화적 삶을 보장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삶정치적 생산의 시대인 오늘날, 창작자-사용자를 가르는 구분선은 점점 흐려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컨텐츠와 그 유통망에 고정시켰던 초점을 줌아웃하여 생산-유통-소비가 한데 뒤얽혀 일어나고 있는 ‘하드 네트워크’의 재전유를 이야기할 차례다. 여기서는 그간 생산-유통-소비라는 경제학적 프레임에 맞추기 위해 사용되어온 생산자-소비자(그리고 그 연결고리를 조금이나마 약화시켜 보고자 택했던 창작자-사용자)라는 임의적인 구분 대신 ‘접속자’라는 통합적인 주체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접속자들의 하드 네트워크 재전유는 소유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도전인 카피레프트운동에서 도 간과되고 있는 주장이다. 하드 네트워크의 재전유는, 사실상 공공재나 다름없지만 상품으로 판매되고 있는 통신서비스를 무상서비스로 쟁취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경제가 정보경제이자 금융경제이며, 그 핵심이 ‘흐름’―정보경제의 키워드인 스트림도, 금융경제의 화두인 유동성도 모두 흐름의 형상을 띤다―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통신망은 생산의 정보화를 위해 국가주도로 구축된 기반시설(인프라)이며, 구축된 망 내 유동성을 담보하는 것은 바로 접속자들의 활발한 통신행위(트래픽)이다. 이런 상황에서 상품으로 판매되고 있는 통신서비스는 사실상 공공재나 다름없으며, 우리는 이것의 재전유를 무상급식이나 청년수당처럼 쟁점화해야 한다.

  특히 한국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터넷 속도와 광대역 보급률로 유명하다. 컨텐츠 전송 네트워크(CDN) 기업 아카마이(Akamai)의 2015년 4분기 인터넷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평균 접속 속도는 26.7 Mbps(2위 스웨덴 19.1, 세계 평균 5.6)로 초당 약 3MB(저음질의 음악파일 1개에 해당되는 용량)를 전송할 수 있는 수준이며 광대역 보급률에서도 전 분야(4Mbps 이상 97%, 10Mbps 이상 81%, 15Mbps 이상 63%, 25Mbps 이상 37%) 1위를 차지했다.17) 일각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좁은 국토 덕분이라거나 정부의 추진력으로 설명하려고 하지만, 가장 큰 유인은 다름 아닌 한국의 인터넷 접속자들이다. 정부 주도로 방방곡곡 인터넷망을 구축했다 하더라도 메일링, 검색, 상거래, 댓글 등 인터넷을 열심히 누비는 접속자들이 없었다면 이렇게 압도적인 규모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본소득과 더불어 하드 네트워크를 기본공통재로 쟁취해야 하는 것은 단지 가구당 또는 일인당 통신비를 줄이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그 과정은 상당한 인식의 전환을 동반할 것인데, 바로 하드 네트워크를 매달 구매해야 하는 상품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실제로 펼쳐지는’ 시공간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펼쳐지는 우리의 삶이 네트워크에 생기를 부여하는 대단히 생산적인 활동임을, 그래서 우리가 실은 수동적인 소비자가 아니라 온갖 마주침(네트워킹)을 통해 측정불가능한 부를 산출하고 있는 능동적인 생산자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글자 그대로 ‘버추얼’(virtual)하고 ‘모바일’(mobile)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앞서 다룬 소프트 네트워크 및 컨텐츠는 물론 하드 네트워크까지 ‘기본’공통재로서 주장할 자격이 있다.



* * *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지금보다 더 많은 네트워크와 컨텐츠를 향유할 수 있다. 양적으로 많아질 뿐만 아니라 선택의 여지 또한 넓어질 것이다. 그래서 기본소득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네트워크 및 컨텐츠를 기본공통재로서 재전유하자는 주장은 성가시고 불필요한 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삶정치적 생산의 시대인 오늘날 네트워크 및 컨텐츠의 재전유는 생산물의 재전유일 뿐만 아니라 생산수단의 재전유이기도 하다. 그것은 특정의 완결된 생산물의 형태를 띠더라도 곧바로 또 다른 생산에 필요한 정보, 아이디어, 영감으로서 기능한다. 이는 더 신속하게 그리고 더 직접적으로 공유될수록, 다시 말해 자본의 개입 없이 자율적으로 공유될수록 더욱 다양하고 풍성한 마주침을 낳는다. 

  네트워크 및 컨텐츠가 기본공통재로서 주어질 경우 어떤 효과가 생겨날까? 앞에서 언급한 창작자들의 삶을 떠올려보자. 뜬금없지만, 그들은 왜 창작활동을 하는 것일까? 할 줄 아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인가? 아니다. 그들은 생계를 위해 불안정노동을 병행하면서 창작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창작활동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렇게 물으면 대부분 ‘하고 싶으니까’, ‘재밌으니까’ 같은 싱거운 대답을 내놓거나 자신에게 큰 희열을 안겨준 어떤 순간을 회상할 가능성이 크다. 뭔가를 하고 싶다는 욕망과 그것을 했을 때 느끼는 희열로부터 수많은 창작이 시작되며, 이 창작(물)이 또 다른 희열이 되어 또 다른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네트워크 및 컨텐츠가 기본공통재로서 주어진다는 것은, 창작의 소스가 무조건적으로 접근가능한 형태로 무한히 제공됨을 의미한다. 그렇게 생산된 창작물은 다른 사람들에게 또 다시 기본공통재로서 제공되어 또 다른 창작을 자극할 것이며, 이때 창작자는 예전과 달리 자신의 생산물이 얼마나 팔렸나에 촉각을 곤두세울 필요가 없어진다. 이제 창작물은 오로지 그것만의 특이성, 그것만의 사용가치로 향유되고 평가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산형태, 나아가 이러한 삶-형태가 기본소득을 통해 보다 안정적으로 재생산된다면 자본이 부과하는 궤도를 이탈하여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질 것이다.

  기본소득 담론과 운동은 자본주의사회가 구축된 이래로 너무나 당연한 원리처럼 간주되어온 노동가치론에 이미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 여기에 제3기본공통재를 연동시켜 노동가치론보다 훨씬 더 오랜 세월 내면화되어온 소유라는 관념에도 도전해보면 어떨까. 임금과 소유의 시대를 넘어 소득과 접근의 시대로 이행하려는 이러한 노력은, 우리의 삶을 둘러싼 모든 소외를 극복하고 자율적인 생산으로 나아가는 기획이며 궁극적으로는 자본의 것과는 다른 리듬으로 삶을 구축하는 기획이 될 것이다.










1) 기본소득의 사회적 의의로서 무조건성(‘시혜’ 모델과의 결별)과 개별성(‘가족 및 부양자’ 모델과의 결별)이 항상 중점적으로 다뤄지는 데 반해, 시간의 자율은 ‘개인이 누릴 자유’, ‘선택의 여지’ 정도로 가볍게 다뤄지는 듯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시간의 자율은 곧 시간 주권의 탈환을 의미하며 이러한 잠재력을 가진 기본소득의 도래는 일종의 거대한 인류학적 전환점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표준시각의 도입이 시간이라는 척도에 갇힌 근대인을 만들어낸 것처럼, 기본소득을 통한 시간의 자율은 새로운 리듬(탈척도)으로 삶을 조직하는 신인류를 만들어낼 것이다. 이에 대한 탐구는 차후의 과제로 삼기로 한다.   

2) BIKN은 기본소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기본소득은] 모든 사회 구성원 각자에게, 어떠한 자산 심사와 노동 요구 없이, 국가 또는 사회공동체가 지급하는 조건 없는 소득입니다. 생활을 충분히 보장하는 수준으로 정기적으로 지급하며 교육, 의료, 주거, 보육, 노후 등의 보편 복지와 함께합니다.”

   (http://basicincomekorea.org/all-about-bi_q-and-a/#toggle-id-1)

3) 山森亮, 󰡔ベーシック・インカム入門󰡕, 光文社, 2009, 250-254쪽.

4) 나는 「삶정치적 기본소득을 위하여」라는 글에서,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가 현대 사회의 생산양식으로 제시한 ‘삶정치적 생산’을 개괄하고 그들이 주장해온 다중의 세 가지 요구―지구시민권·보장소득·재전유권―와 기본소득의 결합을 시도한 바 있다. 삶정치적 생산은 “먼저 시간의 측면에서 고용된 시간, 즉 노동시간에만 일어나지 않는다. 다음으로 장소의 측면에서 그것은 더 이상 작업장(그곳이 근대적인 산업노동의 장소인 공장이든, 탈근대적인 비물질적 노동의 장소인 매장이나 사무실이든)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가치의 측면에서 삶정치적 생산은 부를 교환가치의 원천이지만 결코 그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으로, 즉 항상 가치법칙을 초과하는 것으로 마주한다.” 은혜, 「삶정치적 기본소득을 위하여」, 󰡔진보평론󰡕, 제45호, 2010. 삶정치적 생산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다음을 참조하라. 네그리‧하트, 정남영‧윤영광 역, 󰡔공통체󰡕, 사월의책, 2014, 197-221쪽. 진성철, 「공통적인 것과 새로운 해방의 공간」, 󰡔자본의 코뮤니즘 우리의 코뮤니즘󰡕, 난장, 2012.

5) 네그리와 하트는 『공통체』에서 공통적인 것을 자연적인 형태와 인공적인 형태로 나눈다. 자연적 형태의 공통적인 것이 땅‧광물‧물‧가스와 같은 생태적 영역에 있는 것이라면, 인공적 형태의 공통적인 것은 언어‧이미지‧지식‧정동‧코드‧습관‧실천 속에 있다. 네그리‧하트, 정남영‧윤영광 역, 󰡔공통체󰡕, 사월의책, 2014, 205-208쪽.

6) “해적운동 역시 기본소득과 결합함으로써 ‘해적들의 딜레마’를 현실적으로 타개할 수 있다. 현재의 컨텐츠 생산-유통-소비 구조 속에서 해적행위는 본의 아니게 대자본과 소생산자 모두에 균열을 가져온다. (‘굿 다운로더’ 캠페인이 바로 소생산자를 인질로 삼아 굿 다운로드, 즉 ‘제값 내고 소비하기’를 강요하는 자본과 국가의 대표적인 술수이다. 그런데 ‘제값’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긴 하는 건가?) 기본소득은 컨텐츠 생산자들의 자립과 해적행위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할 것이며, 이로써 해적행위가 이른바 ‘팀킬’이 될 여지는 사라지고 해적들은 오로지 자본 및 국가의 해적으로서만 남게 될 것이다.” 은혜, 「점령자, 해적, 그리고 기본소득 : 공통적인 것의 재전유를 위한 우리의 무기」, 2012 기본소득 국제대회 <금융자본주의를 점령하라> 자료집, 95쪽.

7) 단편선, 「공공재로서의 음악을 향해 : 우리에게 더 많은 언더그라운드를!」, 2011 기본소득학술대회 <청년, 예술, 불안정노동과 기본소득> 자료집, 75쪽.

8) jaripmusic.org

9) blog.naver.com/artist_union

10) musicianU.egloos.com

11) bmcoop.org

12) 이 단체들의 성격과 활동방향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다음을 참조하라. 이동연, 「문화적 어소시에이션과 생산자-소비자연합 문화운동의 전망」, 󰡔문화과학󰡕, 제73호, 2013. 박선영, 「대안음악을 위한 세 가지 목소리 : 바른음원협동조합, 뮤지션유니온, 자립음악생산조합」, 󰡔문화과학󰡕, 제80호, 2014.  

13) 예컨대, <예술인소셜유니온(준)> 발족식에서는 ‘누가 누가 더 당했나’라는 제목의 집담회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유니온 준비과정에서 ‘떼인 돈 받아줍니까’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한다.

   (미디어오늘 2012년 10월 19일자 기사 「예술인들 “밥 먹고 예술합시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5612)

14) 이상은 경향신문 2012년 8월 31일자 기사 「“예술인도 노동자다” … 출범 앞둔 ‘예술인소셜유니온’」 중에서 나도원 공동준비위원장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8311725151&code=940702)

15) 이상은 <자립음악생산조합> 소개글에서 인용한 것이다. (http://jaripmusic.org/about)

16) 이는 창작물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없애자는 주장이 아니라 저작 재산권을 겨냥하려는 것이며, 창작물을 소유(property)의 문제가 아니라 접근(access)의 문제로 사고해보자는 제안이다. “구체적으로, 현행 저작권법 상에서 양도와 상속이 불가능한 공표권(저작물을 공표할 권리), 성명 표시권(스스로의 이름을 밝힐 권리), 동일성 유지권(저작물을 바꾸지 못하게 할 권리) 등 ‘저작 인격권’을 제외한 나머지 권리, 즉 ‘저작 재산권’에 대해선 현행보다 훨씬 그 권리를 제한하는 방향으로 선회하는 것이 전체 사회적으로 보았을 때도 훨씬 이롭다 할 수 있다.” 단편선, 「공공재로서의 음악을 향해 : 우리에게 더 많은 언더그라운드를!」, 2011 기본소득학술대회 <청년, 예술, 불안정노동과 기본소득> 자료집, 75쪽.

17) 아카마이 인터넷 현황 보고서 https://www.akamai.com/kr/ko/our-thinking/state-of-the-internet-re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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