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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할 思 슬퍼할 悼 본문

쓰다

생각할 思 슬퍼할 悼

은혜 Graco 2016. 11. 6. 23:21


2015. 10. 7


<사도>를 봤다. 


영화관을 나서면서 정조가 안 미친 게 용하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의 '사도'의 대상은, 아비도 아들도 박복한 궁궐의 여인네들도 아닌 어린 이산이었다. 영조가 눈물을 흘릴 때는 '당신은 울 자격도 없다'는 눈으로 쏘아보게 되고 사도가 울 때는 '진즉에 궁을 떴어야지'라며 혀를 차게 됐는데, 어린 산이 울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아마도 나는 어린 산과 나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영조와 사도 두 사람 모두에게서 '윗세대'를 발견한 것 같다. 


그러나 영조와 사도는 전혀 다른 인간이다. 사실 영화를 곱씹을수록 사도가 미쳐 날뛴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맙기까지 하다. 사도가 미치지 않고 영조의 관점에서 '성군'이 되었다면, 아마 아들 산에게 할아버지 못지 않은 '폭군'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난 거의 100% 확신한다. 오이디푸스 삼각형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사도의 덕은 아비의 생각을 내면화하지 않고 그것과 불화했다는 데 있다. 사도는 자신은 원망과 컴플렉스의 노예였을지언정 자신의 아비처럼 원망과 컴플렉스를 대물림하지는 않았다. 그가 이룬 단절은 돌파가 아니라 붕괴였고 구성적인 것이 아니라 자생적인 것이었지만, 적어도 그는 오이디푸스 삼각형을 온몸으로 거부했고 죽음으로써 일정한 균열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은 끔찍하지만 필요한 단절이었다. 


나는 사도가 궁을 떠나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야 했다고 본다. 스스로 고아가 되는 것. 아니면 혹자의 말대로 칼을 뽑았을 때 베었어야 했다고 본다. 스스로 패륜아가 되는 것. 하지만 그는 어느 쪽도 택하지 않았다. 아니 택하지 못했다. 궁을 떠난다는 건 상상도 못했을 것이고 참다 참다 뽑은 칼도 아들의 목소리 앞에서 내려놓고 말았다. 이것이 사도의 한계다. 고아와 패륜아라는 양자택일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중구속 상태. 이것이 바로 그의 광기가 오이디푸스 삼각형을 뚫지 못하고 주저앉아버린 지점이다. 


그는 이 삼각형으로 아들을 옭아매지는 않았지만, 자신은 여전히 그 삼각형 안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도망치지도 못했고 아버지를 죽이지도 못했고 자결을 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뒤주에 갇혀 죽었다. 나에게 <사도>는 신자유주의적 권위주의에 억눌린 젊은 세대를 조명 또는 대변하는 영화가 아니라, 미시적이지만 너무나 압도적인 이 권력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를 묻는 영화다. 그리고 이 물음은 젊은 세대에게도 이른바 기성세대에게도 공히 유효한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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