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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삶정치적 기본소득을 위하여 -- <진보평론> 45호 본문

쟁이다

[논문] 삶정치적 기본소득을 위하여 -- <진보평론> 45호

은혜 Graco 2016. 4. 3. 19:33



삶정치적 기본소득을 위하여





“우리의 자연상태는 실로 다중의 공통적 네트워크 속에서 창조되는 것이다.”

- 네그리․하트



  디킨즈의 소설 『어려운 시절』(1853)에는 ‘숫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소녀가 등장한다. 씨씨라는 이름의 이 아이는 ‘사실’을 가르치는 데 혈안이 된 학교에서 엉뚱한 대답을 늘어놓는 ‘지진아’이다. 씨씨는 ‘국가의(national)’ 부를 ‘자연의(natural)’ 부라고 잘못 말해놓고 “같은 얘기 아닌가요”라고 천진하게 묻는다. 그는 “국가에 오천만 파운드의 돈이 있다면 부유한 나라인가”라는 선생의 질문에 “모른다”고 대답해 핀잔을 듣는데, 그렇게 대답한 이유는 “누가 돈을 갖고 있는지, 그 중 얼마라도 제 돈인지 아닌지를 모른다면 부유한 나라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또 “시민 백만명 중 일년에 스물다섯명만이 굶어죽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굶어죽는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백만명이든, 백만명의 백만배이든 마찬가지로 견디기 힘든 일”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일정 기간 동안 십만명의 선원 중 오백명만이 죽었다면 비율이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한다. “죽은 사람의 친척들과 친구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말이다.[각주:1] 
  ‘무조건적 기본소득’(이하 기본소득)은 우리에게 ‘사실’로 주어진 것을 비판하고 재구성하는, 그리고 나아가 새로운 사실을 창조하는 기획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 소녀의 ‘어리석음’은 기본소득을 마주하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는 자연의 부로부터 국가의 부를 추상해낼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국가의 부가 자연의 부에서 발생한 것임을 직관해내는 힘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백분율을 계산할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부의 측정불가능성을 감지해내는 힘을 가진 사람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기본소득을 마주하고 있는 우리가 반드시 갖춰야 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기본소득이라는 기획은 부와 그것의 생산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전제하는 동시에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본소득이 전제하는 것은 무엇이고, 그것이 요구하는 것은 또 무엇인가. 이것을 밝히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기본소득이 전제하는 것은 오늘날 생산이 더 이상 노동가치론에 의해 설명될 수 없을 정도로 변화했으며, 적대의 선이 임금관계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곧 부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발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기본소득을 ‘분배정의’나 ‘인권’의 문제로 여기든 ‘자본에 의해 수탈된 것의 환수’로 여기든, 부의 분배에 앞서 부의 발생을, 즉 부의 생산 메커니즘을 다루는 데서 출발해야한다. 생산 메커니즘에 대한 고찰은 우리가 기본소득을 요구하는 근거를 밝히는 것이기에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나아가 우리는 새로운 생산 메커니즘으로의 이행이라는 전제를 검토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부의 생산에 기여하는 모든 이들의 자율로 기본소득을 이끌어야 한다. 기본소득이 이러한 생산의 이행을 전제하고 있는 한, 그것은 사실상 자신에게 부과된 ‘기본’이라는 제한을 언제든지 벗어던질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제한을 걷어내는 과정은 기본소득이 갖는 정치적 함의의 진폭과 방향을 바꿔놓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기본소득의 정치적 함의는 구체적인 정책이나 경제학적 모형으로부터 도출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 정치학자 캐롤 페이트먼(Carole Pateman)이 강조하듯, 기본소득을 보는 관점을 “개인의 기회로서의 자유”에서 “자치나 자율성”으로, 그리고 그 “실현가능성”을 증명하는 것에서 “정치적 상상력”을 펼치는 것으로 옮길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각주:2] 요컨대 이 글에서 제시하는 기본소득은 새로운 삶을 구성하는 기획이자 운동으로서의 기본소득, 즉 삶정치적(biopolitical) 기본소득이다. 



  초과 : 삶정치적 생산으로의 이행 


  이탈리아 기본소득네트워크의 부대표인 안드레아 푸마갈리(Andrea Fumagalli)는 기본소득을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대항권력으로서 조명하는데, 그는 인지자본주의로의 이행이라는 맥락에서 “노동에 대한 보수(remuneration)가 삶에 대한 보수로 번역”된 것으로 규정한다. 즉 임금이라는 포드주의적 보수에서 ‘실존의 소득’(income of existence)으로의 이행인 것이다. 이때 투쟁은 고임금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취직 여부와 관계없는 지속적인 소득을 요구하는 싸움이 되며, 이것은 곧 노동시간과 삶시간을 분리해내는 것이 불가능함을 보여준다고 그는 설명한다.[각주:3] 이처럼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는 ‘생산의 이행’을 전제하고 있으며, 이러한 논의가 사회적 요구로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이행이 잠재적인 것으로서만 머물지 않고 현실적인 것으로서도 충분히 경험되고 있음을 증명한다.             
  기본소득이 전제하고 있는 생산의 이행은 네그리와 하트의 작업에서 심도 깊게 전개되어 왔다. 『제국』, 다중, 그리고 커먼웰스(Commonwealth)로 이어지는 그들의 작업은 지구화라는 맥락에서 생산의 탈근대화와 그것의 동력으로서의 계급투쟁을 입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 작업의 첫 결실인 제국에서 그들은 생산의 탈근대화를 ‘생산의 정보화’라는 맥락에서 고찰하면서 공통적인 것(the common)과 삶정치적 생산을 예비적으로 검토한다.[각주:4] 여기서 정보화는 단순히 통신망과 같은 기반시설이나 스마트폰 같은 하드웨어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들은 분명 컴퓨터라는 보편적 도구의 확보를 지적하고 있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컴퓨터화가 가져오는 노동의 재구성이다. 일례로 스마트폰이라는 하나의 생산물을 생각해보자. 우리가 스마트폰이라고 부르는 것은 특정한 부피와 무게, 모양을 가진 유형의 내구재 그 이상이다. 우리는 그와 동시에,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그것을 통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수많은 창조적 활동들과 그것이 가져올 (그리고 이미 가져온) 새로운 사회적 현상들을 항상 염두에 둔다.    
  ‘유비쿼터스’라는 말이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전개된 생산의 정보화는 노동의 재구성에 있어 두 가지 양상을 보이는데, 그 중 하나는 임금노동 안에서의 변화이다. 오늘날의 임금노동은 반드시 노동시간에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메일링부터 브레인스토밍까지 근무시간 이후에 사무실 바깥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것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비일비재해졌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것은 언제 어디서 떠오를지 알 수 없는 생산적 아이디어들과 언제 어디서 이루어질지 모르는 마주침들을 그때그때 알맞게 처리하고 증진시킬 수 있는 환경이 구현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잔업’이나 ‘야근’과 같은 임금노동의 언어로는 포착할 수 없는, 미시적이지만 매우 중요한 노동행위이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강력하고 근본적인 변화는 임금노동의 외부에서 일어났다. 과거에는 비노동으로 분류되었던 활동들이 갖는 생산적 힘이 현대 경제를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그러한 활동들은 언어․이미지․코드 등의 형태로 통신망을 흘러다니면서 누군가에게 이른바 정보와 써비스로서 작용한다. 여기서 내구재로서의 스마트폰은 생산이 이루어지는 하나의 일시적인 마디일 뿐, 스마트폰을 스마트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는 인간활동의 상호작용 그 자체에 있다. 그리고 정보 및 써비스 재화는 내구재와 달리 관련업체를 통해서만 생산되지 않는다. 가령 우리가 애용하고 감탄해마지 않는 포털싸이트의 지식제공 써비스를 보자. 그 써비스는 해당업체가 제공하는 것인가. 여기에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해당업체가 적어도 지식교류의 장은 제공한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것조차도 광고수주와 직결되는 우리의 클릭행위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처럼 정보경제의 키워드인 유비쿼터스는 곧 생산이 유비쿼터스해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이러한 노동의 재구성을 ‘비물질적 노동의 헤게모니’라고 칭하며, 그것의 두 가지 측면을 강조한다.[각주:5] 그들은 먼저 “노동과정의 실재적 동질화”, 즉 이질적인 구체적 노동이 추상적 노동(맑스가 말하는 ‘인간 노동력 일반의 지출’)의 지위를 획득하는 과정에 주목한다. 대공업체제의 구축을 통해 일정정도 실현되었던 이 동질화는 정보화와 비물질화 이후 더욱 완벽히 실현되었는데, 특히 노동과정이 근대적 산업생산의 장소인 공장을 벗어나 사회적 삶 전체로 흘러넘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것은 단순히 작업장의 수와 종류가 증가했음을 의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근대적 산업생산의 틀에서 확고히 분리되었던 이른바 생산의 장소와 소비의 장소가 구별 불가능한 정도로 겹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임금노동이 노동시간을 초과하여 일어날 뿐만 아니라 삶시간 전체가 생산시간이 되고 있다는 점, 즉 노동과 비노동이 더 이상 구별 불가능하다는 점이 핵심인 것이다. 

  다음으로 그들은 비물질적 노동의 정동적(affective) 측면에 주목한다.[각주:6] 앞서 언급했듯이 오늘날 생산물의 쓰임은 더 이상 그것의 물리적 형상과 기능에만 국한되지 않는데, 그것은 단순히 생산의 결과가 비물질적 형태를 띤다는 사실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더 나아가 그러한 결과를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접속과 상호작용”에 주목한다. 이것은 감정노동 또는 돌봄노동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범주화된 써비스업에서 ‘고객응대’가 평가항목으로서 강조되고 ‘직원소양교육’의 중요성이 높아지는 것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다. (고객과의 통화내용을 감청당하는 콜센터의 상담노동자들을 떠올려보라.) 이처럼 노동에서 정서작용이 갖는 중요성은 오늘날 비물질적 노동의 헤게모니 하에서 더욱 핵심적이 되고 있다. 이는 이러한 정서작용이 순간적인 기분이나 감정에 머물지 않고 생산성과 직결되는 활력의 증감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비물질적 노동의 정동적 측면은 다중』에서도 계속해서 강조되고 있다.[각주:7] 다중에서 나타나는 비물질적 노동의 새로움은 협력을 사고할 때 더욱 두드러진다. 네그리와 하트는 『제국』에서 비물질적 노동의 헤게모니와 함께 협력이 “노동활동 자체에 완전히 내재적”[각주:8]임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다중에서 그 내재성은 ‘노동의 공통되기’로 표현된다. 비물질적 노동의 헤게모니가 전면화된 오늘날 협력은 구체적 노동형태들의 합 이상이다. 그 초과의 지점은 바로 공통의 삶과 새로운 주체성의 생산에 있다. 생산의 시간이 곧 삶시간이 되고 생산의 장소가 사회적 삶 전체로 확장되어 ‘장소 아닌 장소’(non-place)가 되고나면,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마디들이 생산의 주체가 되며 각각의 특이한 삶은 서로를 깊숙이 침투하고 전염시키면서 공통의 삶을 이룬다. 

  특이성들의 공통되기를 통한 사회적 삶의 생산, 이것이 바로 삶정치적 생산의 중요한 한 측면이다. 삶정치적 생산은 먼저 시간의 측면에서 고용된 시간, 즉 노동시간에만 일어나지 않는다. 다음으로 장소의 측면에서 그것은 더 이상 작업장(그곳이 근대적인 산업노동의 장소인 공장이든, 탈근대적인 비물질적 노동의 장소인 매장이나 사무실이든)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가치의 측면에서 삶정치적 생산은 부를 교환가치의 원천이지만 결코 그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으로, 즉 항상 가치법칙을 초과하는 것으로 마주한다. 척도(시간적․공간적 측정과 정치경제학적 가치법칙)를 초과하고, 생산과 소비의 구분은 물론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구분까지 무력화하는 부는 그야말로 ‘삶정치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산적 부가 취하는 형태가 바로 ‘공통적인 것’이다.   

  생산이 척도를 초과하고 있다는 것은 적대 역시 척도를 초과하여 이루어지고 있음을 뜻한다. 과거 산업생산의 시대에 적대는 임금관계에 기반한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적대로 드러났다. 그러나 임금관계는 생산이 삶정치적으로 일어나는―내구재뿐만 아니라 지식이나 정보 같은 비물질적 재화는 물론, 궁극적으로는 공통의 삶과 새로운 주체성이 생산되는―오늘날 붕괴되고 있다. 노동자들의 재생산에 필요한 가치를 생산하는 필요노동시간과 자본가에 의해 전유되는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잉여노동시간의 분할, 그리고 필요노동의 잉여노동에의 종속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삶정치적 생산에서는 이제 “공통적인 것이 잉여가치의 장소”[각주:9]이다. 산업생산의 시대에 불변자본이 수행한 생산물로의 가치이전은 실제로 삶정치적 생산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다. 오늘날 경제를 떠받치는 두 기둥인 금융과 부동산의 경우, 자본은 가치 생산에 어떠한 기여도 하지 않는다. 금융에서 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수많은 자료들을 분석하는 지적 활동이며, 그 자료들은 사람들의 취향․소비패턴․신용도 등 모두 공통적인 것에 기반하고 있다. 부동산은 어떠한가. 부동산의 가치를 발생시키는 것은 사람들의 왕래, 거기서 일어나는 마주침들과 사건들, 입소문 등 공통적인 것 그 자체이다. 

  이처럼 오늘날 자본은 점점 생산의 조직화의 외부에 있게 되고, 그만큼 생산은 자본으로부터 점점 자율적이 되어간다. 그래서 오늘날 자본이 행하는 공통적인 것의 전유는 착취라기보다 수탈에 가깝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날의 프롤레타리아트는 고용된 노동자가 아니라 공통적인 것의 생산에 참여하는 (고용된 노동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제 자본과의 적대는 더 많은 임금과 더 나은 노동조건을 요구하는 임금노동자들의 투쟁이 아니라, 공통적인 것의 재전유와 노동의 강제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하는 생산자들의 투쟁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기본소득이 주요한 투쟁의 장으로 부상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적대 : 공통적인 것과 소유의 공화국 


  생산의 비물질적․정동적 측면을 강조해온 네그리와 하트는 최근작인 커먼웰스에서 삶정치적 노동의 기술적 구성(technical composition of biopolitical labor)을 고찰함으로써 삶정치적 생산에 대한 논의를 보다 정교화한다. 그들은 생산활동 그 자체와 생산의 시간, 생산의 공간이라는 세 가지 측면으로부터 삶정치적 생산이 갖는 세 가지 경향을 도출해낸다. 그것은 바로 ‘비물질적 생산의 헤게모니’(생산활동 자체), ‘노동의 여성화’(생산의 시간), ‘이주와 혼합’(생산공간)이다.[각주:10] 

  삶정치적 생산의 첫 번째 경향은 비물질적 생산의 헤게모니이다. 우리는 앞서 『제국』에서 비물질적 노동의 헤게모니로 정식화되었던 이 경향이 『다중』을 거치면서 비물질적/삶정치적 생산의 헤게모니로 정교화되는 과정을 살펴본바 있다. 여기서 핵심은 인간의 지적․정동적 능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주체성의 생산에 있었는데, 커먼웰스』에서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생산”(로버트 보이어 로베르 부아예 Robert Boyer), “인간발생적 모델”(크리스찌안 마라찌 Christian Marazzi) 등의 표현을 통해 한층 더 강조되고 있다. 이것은 살아있는 존재들이 고정자본이 되고 '삶 형태(forms of life)'의 생산이 부가가치의 토대가 됨을 의미한다.[각주:11] 바로 이 지점에서 생산의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무너지고, 공통적인 것이 “생산적 힘이자 생산된 부가 취하는 형태”[각주:12]로서 나타난다. 

  삶정치적 생산의 두 번째 경향은 노동의 여성화이다. 이때 ‘여성화’라는 표현은 세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 먼저 양적인 측면에서 그것은 여성노동력의 비율이 증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질적인 측면에서 그것은 노동의 시간적 유연성을 가리킨다. (물론 이것은 남녀 모두에게 동일하다.) 끝으로 헤게모니적 측면에서 그것은 이른바 ‘여성의 일’로 분류되어왔던 노동이 점점 중심적이 되고 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여성의 일이 정동적 노동으로서 갖는 특질에서 기인한다. 그러한 특질로 인해 오늘날의 생산은 상품생산에 그치지 않고 삶 형태와 관계들의 생산으로 확장되며, 이로써 생산과 재생산, 그리고 노동시간과 삶시간 의 구분이 불가능해진다. 즉 노동의 여성화는 공통적인 것의 시간적 자율을 함축한다.

  마지막으로 삶정치적 생산의 세 번째 경향은 이주와 혼합이다. 이때 이주와 혼합은 인종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을 동시에 내포한다. 그것은 양적인 측면에서 노동시장을 전지구적인 것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질적인 측면에서도 큰 변화를 가져온다. 그 질적인 변화 중 하나는 인종적 갈등이며, 다른 하나는 이주노동 안에서 ‘저렴하고 유연한 여성노동력’(노동의 여성화)의 비중이 늘어나는 것이다. 이주와 혼합이라는 경향은 이처럼 인종적․젠더적 위계를 포함하고 있지만, 동시에 적대와 탈주의 지점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오늘날 생산의 공간은 장소 아닌 장소이기에, 이주와 혼합이 낳는 효과는 그것이 초국적이든 일국적이든 단순한 장소적 확장을 넘어선다. 그것의 핵심은 살아있는 존재들과 삶 형태들의 마주침 혹은 관계, 다시 말해 공통적인 것의 생산에 있다. 즉 이주와 혼합은 공통적인 것의 공간적 자율을 함축한다.

  자본은 이러한 각각의 경향에 대응하는 지배전략을 펼친다. 먼저 비물질적 생산의 헤게모니에 대한 대응은 공통적인 것에 대한 통제로 드러난다. 통제양식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뉘는데, 내포적으로는 “생산의 공통적 기초를 분할하거나 고갈시키고” 외연적으로는 금융을 통해 “공통적인 것의 산물들을 사유화”한다.[각주:13] 그러나 이 전략은 공통적인 것을 파괴함으로써 삶정치적 노동의 생산성을 감소시킨다. 지금까지 살펴본 생산의 이행과정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오늘날의 경제는 그야말로 ‘삶정치적’이기 때문에 생산적 힘이자 그 산물인 공통적인 것을 파괴하는 것은 현대 경제의 기초와 동력을 제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공교육 지원금의 삭감과 지적소유권 침해에 대한 감시와 처벌 등은 자본이 공통적인 것을 파괴하는 전형적인 방식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자본은 노동의 여성화가 가져온/올 시간적 자율을 통제하기 위해 ‘노동유연화’를 극단으로 밀어붙여 불안정하게 만든다. 자본은 이제 노동시간을 늘림으로써 노동자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시간과 비노동시간의 구분이 사라진 상태에서 언제나 노동할 준비가 되어있도록 만듦으로써 노동자들을 지배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노동이 갖는 생산적 힘은 정동적 측면에 있기 때문에, 그것의 생산성은 시간을 자율적으로 조직함으로써 잘 발휘될 수 있다. (스스로 조직할 시간을 박탈당한 ‘멀티잡’의 노동자를, 그리고 그가 수행하는 생산 및 재생산의 질을 생각해보라.) 이처럼 자본은 시간을 빼앗음으로써, 즉 시간의 빈곤을 초래함으로써 삶정치적 노동의 생산성을 파괴한다. 

  끝으로 자본은 이주와 혼합이 가져온/올 공간적 자율을 통제하기 위해 공간적․사회적 장벽들을 세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국경의 강화(국경수비의 강화든 법률적 제재의 강화든)로, 다른 한편으로는 일국 내의 인종적 차별이나 사회문화적 차별로 나타난다. (2005년 프랑스 방리우 봉기는 후자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공간적 폐쇄와 사회적 위계 역시 모순을 낳는데, 그것은 삶정치적 노동의 생산성과 직결되는 특이성들의 마주침과 그것의 평등한 관계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본은 이동을 통제함으로써, 즉 공간의 빈곤을 초래함으로써 삶정치적 노동의 생산성을 파괴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노동과 자본의 적대는 공통적인 것과 소유의 공화국[각주:14] 사이의 적대로 번역할 수 있다. 그것은 디킨즈가 씨씨의 목소리를 빌어 말하고 있는 ‘자연의 부’와 ‘국가의 부’의 적대이다. 자연의 부와 국가의 부가 ‘같은 얘기 아니냐’는 그의 질문은 국부를 공통적인 것에서 분리해내려는 시도를 겨냥하고 있다. 이때의 부는 주권(그것이 일국적이든 초국적이든)에 의해 사적인 것(the private)과 공적인 것(the public)으로 양분된 부이다. 그리고 이것은 공통적인 것(the common)과 달리 일자의 소유로 나타난다. 사적인 부가 원자화된 개인의 소유라면, 공적인 부는 국가라는 일자의 소유이다. 따라서 공적 소유는 사적 소유의 다른 형태일 뿐이며, 공적 소유가 가져오는 것은 (흔히 공공의 이익이라고 기만적으로 불리는) 주권의 이익이지 공통의 이익이 결코 아니다. 이처럼 오늘날의 계급투쟁은 공통적인 것과 소유의 공화국 사이의 적대로 드러난다.
  공통적인 것과 소유의 공화국 사이의 적대 속에서, 기본소득은 공통적인 것과 그것의 항구적인 (시간적․공간적) 자율을 위한 기획으로서 자리한다. 네그리와 하트가 분석한 삶정치적 생산의 세 가지 경향은 이미 『제국』에서부터 제시되어온 바 있는 다중의 세 가지 요구와 겹쳐진다.[각주:15] 즉 이주와 혼합에 대한 대응으로 야기된 공간의 빈곤에 맞서 ‘지구시민권’[각주:16]을, 노동의 여성화에 대한 대응으로 야기된 시간의 빈곤에 맞서 ‘보장소득’을, 비물질적 생산의 헤게모니에 대한 대응으로 야기된 공통적인 것의 파괴에 맞서 ‘재전유권’을 요구하는 것이다. 기본소득은 삶정치적 생산의 세 가지 경향 및 요구 중 두 번째를 정확히 관통한다. 그러나 기본소득을 진정 삶정치적 것으로 구상하기 위해서는 다른 두 경향과 반드시 접속시켜야 한다.
  그러나 그 세 경향을 서로 접속시키기 전에, 먼저 ‘자본의 대응’과 ‘다중의 요구’ 사이의 관계부터 다루고자 한다. 이것은 운동으로서의 기본소득을 구상함에 있어 필수적인 작업이다. 공통적인 것에 대한 소유의 공화국의 대응과 그 모순은 단순히 자본의 자기혁신과 자기모순으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자본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끊임없이 혁신하게 만드는 동력임을 자주 간과한다. 그래서 자본의 변형은 자기혁신이라는 이름으로 과대평가되거나 자기모순이라는 이름으로 과소평가된다. 이러한 관점은 (자본을 어떻게 평가하든 간에) 적대와 모순을 계급투쟁이 아닌 자본의 자기운동으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적실하지 못하다. 
  여기서 우리는 오뻬라이스모(Operaismo)의 역사관으로부터 중요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오뻬라이스모 이론가들은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맑스의 테제를 이어받아 계급투쟁의 동학을 재구성했는데, 그것은 더 이상 적대하는 두 힘의 종합으로 귀결되는 변증법적 운동이 아니다. 거기에는 종합의 계기는 사라지고 두 힘의 각축과 왕복만이 남는다. 즉 “한편으로는 투쟁이 자본의 재구조화를 결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구조화가 미래의 투쟁의 조건들을 결정”[각주:17]하는 일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구성-탈구성-재구성의 투쟁주기를 이루는데, 여기서 ‘계급관점의 역전’(마리오 트론띠 Mario Tronti)이 일어난다. 출발점(구성)은 자본이 아니라 우리이며, 대응(탈구성)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자본이다.[각주:18]


  구성 : 기본소득의 삶정치화

  이제 우리는 삶정치적 생산이라는 ‘구성’(비물질적 생산의 헤게모니, 노동의 여성화, 이주와 혼합)과 그에 맞선 자본의 ‘탈구성’(공통적인 것의 파괴, 시간의 빈곤, 공간의 빈곤)에 이어, 다중의 세 가지 요구라는 ‘재구성’(지구시민권, 보장소득, 재전유권)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삶정치적 생산의 두 번째 경향을 관통하는 기본소득은 다른 두 경향과 함께 재구성의 계기로서 직조되어야 한다. 그것은 개체의 재생산에 머물지 않고 공통적인 것의 재생산으로 나아갈 때만이 삶정치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각각의 접속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첫째, 기본소득과 지구시민권의 접속은 기본소득의 수급자격이라는 문제와 연결되어있다. 그 접속은 기본소득운동의 궤적 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데, 한편으로는 기본소득의 핵심적 덕목인 무조건성―심사와 노동의무가 없이 지급되는―이 시민권의 강도를 보장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기본소득운동의 지구적 네트워킹이 시민권의 외연을 조금씩 확장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의에서 ‘누가 그것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현실화된 기본소득 모델들은 일국적 규모로 설계된 것이기에 기본적으로 국적에 의거하고 있으며, 이주민에게는 일정한 체류기간을 자격조건으로 내걸고 있다. 엄밀히 말해 현실에서의 기본소득은 무조건적이지 않은 것이다.
  기본소득과 지구시민권은 국가간 경계와 사회적 위계라는 분할선 모두를 넘어서는 문제이며, 기본소득이 진정으로 삶정치적이기 위해서는 그것에 어떠한 장벽도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도의적인 주장이 아니다. 삶정치적 생산은 마주침과 소통, 관계 속에서 증진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장벽의 철폐는 생산성의 측면에서 매우 절실한 과제이다. 그리고 기본소득에 대한 요구와 지구시민권에 대한 요구는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따라서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동시적으로 뒤얽히면서도 선순환을 이룸으로써, 공통적인 것의 생산과 그에 대한 자율적 통치로 나아가야 한다.
  둘째, 기본소득과 재전유권의 접속은 기본소득의 수급형태라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이 접속은 기본소득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영향력 있는 틀인 ‘분배’ 개념을 넘어선다. 기본소득을 분배로서 실천하는 것은 소유라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부의 할당을 좀더 정의롭게 수행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유효수요 창출의 메커니즘으로 기획되어 자본주의의 지속가능성에 복무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오늘날 사회적 부가 이미 공통적이며 삶정치적(정동적)이기 때문에, 주로 화폐의 형태를 전제하는 경제적 (재)분배라는 용어는 점점 불필요해지고 있다.[각주:19] 이제 수탈된 것의 환수는 분배가 아니라 그야말로 ‘사용’이자 ‘향유’로서 나타나며, 그 사용 혹은 향유는 소유가 아니라 ‘접근’이라는 방식을 취한다. 이제 우리의 과제는 소유에 기반한 분배 개념이 어색해지는 지점까지 기본소득을 밀어붙이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기본소득이 ‘기본’이라는 제한을 벗어던지는 기획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공통적인 것에 주목함으로써 ‘기본’이라는 문턱을 넘어설 수 있다. 삶정치적 생산이 무르익은 오늘날 공통적인 것은 더 이상 기본, 즉 ‘최소한’이 적용되기 힘든 상황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기본’이 한계가 되는 이유는 공통적인 것 중에서도 인공적인 공통적인 것(the artificial common)의 영역에서 쉽게 발견된다.[각주:20] 정동에 기반한 비물질적 생산물들은 디지털 기술을 통해 무한히 복제될 수 있기 때문에, 최소한을 설정하지 않고도 소득으로서 충분히 보장될 수 있다. 그에 따르는 현실적 어려움은 소유의 공화국이 자행하는 디지털 엔클로저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의 기술적 실현가능성과 별개로 공통적인 것이 갖는 특질이다. 정보, 아이디어, 노하우, 이미지 등 인간의 접속 및 상호작용의 산물과 그 활동 자체에는 권장량이나 평균치가 없다. 이것은 공통적인 것 자체는 물론, 그것에 대한 우리의 욕망 역시 척도를 넘어서 있음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어도 사라지거나 약화되지 않고 오히려 강화되기 때문에 욕망을 제한해야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렇다면 자연적인 공통적인 것(the natural common)은 어떠한가. 하트는 저항과 운동의 관점에서 공통적인 것의 자연적 형태와 인공적 형태를 절합함으로써 ‘공통적인 것의 정치’를 모색한다.[각주:21] 그는 공통적인 것의 자연적 형태와 인공적 형태가 일견 상반된 논리를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인정한다. 인공적 형태가 창조․개방성․무한성으로 특징지워지고 인간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한다면, 자연적 형태는 보존과 한계로 특징지워지며 인간/동물 세계보다 더 넓은 이해관계의 장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차이가 모순적이지 않고 오히려 상호보완적이라고 주장한다.
  하트에 따르면 이 두 형태는 두 가지 논리적 특징을 공유하는데, 첫 번째 특징은 두 형태 모두 소유관계를 거부하며 그에 의해 약화된다는 점이다. 인공적 형태가 더 이상 배타적 소유관계를 유지할 수 없고 사유화하는 즉시 생산성이 떨어지는 지점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그렇다면, 자연적 형태는 그것의 효과가 소유관계를 초월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후자는 자연재해와 같은 부정적 효과들을 떠올리면 즉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재해는 계급과 국경을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두 번째 특징은 지배적인 가치척도를 초과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단순한 양적 초과가 아니라 척도 자체에 대한 거부이다. 앞서 금융과 부동산의 메커니즘을 살펴보았듯이, 오늘날의 경제는 철저히 공통적인 것에 기반하고 있다. (경제학자들과 회계사들은 척도를 초과하는 공통적인 것을 ‘외부성’과 ‘무형자산’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다.) 이러한 측정불가능성은 공통적인 것의 자연적 형태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는데, 그것은 첫 번째 특징에서와 마찬가지로 부정적 효과를 통해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즉 재해는 소유관계를 초월하여 영향을 미치며, 그로 인해 파괴된 삶 형태는 전혀 측정불가능하다. (뉴올리언즈와 아이티에서 파괴된 삶을 떠올려보라. 씨씨가 말했듯이 몇 명이 목숨을 잃든 그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이처럼 공통적인 것의 두 형태는 소유관계와 가치척도에 대한 거부를 공유하고 있다.   여기에 모순이 있다면 축적은 사적인데 생산과 피해는 공통적이라는 점이다. 즉 모순은 공통적인 것의 두 형태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유관계와 공통적인 것 사이에 있는 것이다. 이 두 형태는 근본적으로 삶 형태의 생산에 주목한다는 강한 공통점을 갖고 있으며, 그 차이들의 절합(공통되기)은 “자율을 위한 정치적 행동과 공통적인 것의 민주적 운영을 연결시키는 데”[각주:22] 매우 중요하다.
  이제 다시 ‘기본’이라는 문턱을 응시하자.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우리는 소유관계와 가치척도를 거부하는 공통적인 것에 대해 소유권이 아닌 접근권을 주장해야 하며, 화폐형태로 지급되는 소득뿐만 아니라 ‘공통적인 것에 대한 무조건적 접근권’ 역시 소득으로서 쟁취해야한다. 이것은 소유의 공화국에 의해 파괴된 공통적인 것을 치유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특히 지적소유권의 강화와 교육의 부패에 대한 치유는 매우 중요하다. 지적소유권의 강화는 삶정치적 생산의 원료이자 수단을 봉쇄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교육의 부패는 자본으로부터 자율적인 주체성의 생산을 봉쇄한다는 점에서 매우 치명적이다. 공통적인 것이 생산적 힘이자 그 산물이 된 삶정치적 생산의 시대에, 지식과 교육에 대한 접근은 단순히 ‘써비스’를 제공받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수탈된 것의 환수일 뿐만 아니라 생산수단의 재전유이다.
  이러한 접근은 공통적인 것의 자연적 형태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4대강이나 성미산을 장악하려는 소유의 공화국의 시도는 공통적인 것의 파괴이자 접근권의 봉쇄이다. 4대강과 성미산을 지키려는 운동은 발전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적 발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발전을 주장하고 있다. 이 운동에서 발전은 그곳에 서식하는 동식물과의 공존부터 휴식이나 자연학습까지, 모두 공통적인 것의 발전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어난 마주침들은 언어가 되고 이미지가 되어 또 다른 삶 형태를 창조한다. 이처럼 공통적인 것의 자연적 형태와 인공적 형태는 이미 자연과 문화라는 근대적 도식이 적용 불가능할 정도로 뒤얽혀있다.[각주:23] 따라서 우리는 공통적인 것의 모든 형태를 소유가 아닌 접근의 방식으로 재전유해야 한다.


  삶정치적으로 재구성된 기본소득을 통해 우리가 되찾아야하는 것은 결국 (생산물이 취하는 형태이자 생산활동 그 자체로서의) 공통적인 것이며, 이것은 지금, 이곳에서의 코뮤니즘의 구축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본소득이 가져오는 효과인 동시에 기본소득운동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기획이다. 바로 그 때문에 기본소득은 저항과 운동의 관점에서 지구시민권 및 재전유권과의 접속을 통해 재구성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삶정치적으로 재구성된 기본소득을 위한 운동은 임금노동자 중심의 노동운동으로도, 당사자 중심의 신사회운동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그럼으로써 공통적인 것의 생산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당사자가 되는 새로운 운동이다. 즉 모든 정체성과 그에 따른 이해관계들이 극복되는 ‘운동들의 운동(movement of movements)’인 것이다.
  기본소득의 삶정치적 재구성을 통한 코뮤니즘의 구축은 기본소득을 정치경제학의 영역에서 인류학의 영역으로 이동시킨다. 임금에서 소득으로의 이동은 (그 소득이 비록 제한적으로 구성된다 할지라도) 인간의 자연상태에 대한 오랜 불신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그것은 곧 ‘한정된 자원’과 ‘무한한 욕망’이라는 근대적인 정치경제학적 전제로부터의 해방이다. 이때 한정된 자원은 배타적이며 측정가능한 부를, 무한한 욕망은 부의 결핍에 의한 욕망을 가리킨다. 그러나 삶정치적 생산의 시대에 이러한 틀은 시효를 다했다. 이제 자원과 욕망은 ‘공통적이며 측정불가능한 부’와 ‘특이해지려는 욕망'으로 재정의되어야 하며, 우리의 자연상태는 특이성들의 공통되기를 통해 끊임없이 구성되는 것으로 사고되어야 한다.
  이처럼 우리의 기획은 새로운 인류의 탄생과 즉각 연결된다. 이 새로운 인류, 새로운 주체성을 무엇이라 불러야할까. 네그리와 하트가 제안하듯이 다중이나 빈자로, 아니면 빈자-다중(multitude of the poor)으로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무엇으로 명명하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가난이 갖는 힘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유일한 가난은 척도의 가난이며, 벤야민이 말한 경험의 가난이다. 경험의 가난은 우리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데로 이끈다”는 점에서 “새로운 긍정적인 개념의 야만성”이다.[각주:24] 우리의 경험―가치법칙, 임금관계, 소유관계, 그리고 다른 모든 위계와 분할 등―이 더 이상 아무런 생산적 힘을 갖지 못하는 지금, 이러한 경험의 가난을 토대로 삶정치적 기본소득이라는 전혀 새로운 것을 구상하고 실험하는 우리는 새로운 야만인들이다. 그리고 그 구상과 실험은 코뮤니즘으로 가는 관문이 아니라, 코뮤니즘의 새로운 시작이다. 


 


  1. 찰스 디킨즈, 『어려운 시절』, 장남수 역, 창비, 2009, 98-100쪽. [본문으로]
  2. 캐롤 페이트먼, 「시민권의 민주화 : 기본소득의 장점」, 『분배의 재구성』, 너른복지연구모임 역, 나눔의집, 2010, 155쪽, 159쪽. [본문으로]
  3. A. Fumagalli, “Biocapitalism and Basic Income”. (http://www.bin-italia.org/article.php?id=1503) [본문으로]
  4.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제국』, 윤수종 역, 이학사, 2001. 『제국』에서의 논의를 소개하는 부분은 『제국』 3부 4장, 특히 「비물질노동의 사회학」을 참조하였다. (번역 일부 수정) [본문으로]
  5. 네그리와 하트는 『제국』에서 비물질적 노동을 (1) 비물질적 노동의 헤게모니 하에 있는 산업노동, (2) 분석적․상징적 노동, (3) 정동적 노동으로 분류한다. 『다중』에서 언급된 비물질적 노동의 유형은 『제국』에서 언급된 유형 중 첫 번째 유형이 탈락된 것으로 읽을 수 있는데, 이것은 산업노동에 대한 배제가 아니라 오히려 산업노동이 비물질적 노동으로 향하는 경향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음을 반영한다. 『다중』에서는 비물질적 노동이라는 용어의 모호함을 언급하면서도 경제적 생산의 헤게모니를 더 잘 설명하기 위해 그것을 주로 사용하지만, 최근작인 『커먼웰스』에서는 ‘삶정치적 노동/생산’이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한다. [본문으로]
  6. “정신적 현상들인 정서들(emotions)과는 달리, 정동들은 신체와 정신에 똑같이 관계한다. 사실상, 기쁨과 슬픔과 같은 정동들은 유기체 전체에 담겨있는 삶의 활력의 현재 상태를 보여주며, 신체의 일정한 상태를 사유의 일정한 양태와 함께 표현한다.”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틀 하트, 조정환․정남영․서창현 역, 『다중』, 세종서적, 2008, 144쪽. [본문으로]
  7. 『다중』에서의 논의를 소개하는 부분은 『다중』 2부 1장을 참조하였다. [본문으로]
  8. 『제국』, 386쪽. [본문으로]
  9. 『다중』, 191쪽. [본문으로]
  10. A. Negri, M. Hardt, Commonwealth, 2009. 『커먼웰스』에서 생산 메커니즘 분석을 소개하는 부분은 3부 1장을 참조하였다. [본문으로]
  11. A. Negri, M. Hardt, Commonwealth, 2009, p.132. [본문으로]
  12. 앞의 책, p.280. [본문으로]
  13. 앞의 책, p.145. [본문으로]
  14. 네그리와 하트는 자본과 법이 초월적인(transcendent) 인격적 주권의 형상과는 다른 선험적인(transcendental) 주권형태로서 존재한다고 보며, 양자가 뒤얽혀 사회적 삶이 갖는 가능성의 조건들을 결정하고 지배하는 것을 ‘소유의 공화국 (republic of property)’이라고 부른다.(『커먼웰스』 p.7-8) 소유의 공화국의 구조에 대해서는 『커먼웰스』 1부 1장을 참조. [본문으로]
  15. 다중의 세 가지 요구에 대해서는 『제국』 4부 3장을 참조. [본문으로]
  16. 이 글에서는 ‘right to global citizenship’을 기존의 역어(‘전지구적 시민권’)와 달리 ‘지구시민권’이라고 번역하였다. 그것은 공간적 자율로서의 시민권이라는 맥락에서 ‘global’이라는 수식어에 두 가지 측면이 있음을 강조하고 지구를 하나의 메트로폴리스로 사고하기 위해서이다. 시민권에 대한 요구는 말 그대로 지구적인(혹은 행성적인 planetary) 외연적 시민권뿐만 아니라, 위계의 철폐를 의미하는 내포적 시민권(혹은 시민권의 강도 intensity) 또한 포함하고 있다. [본문으로]
  17. 앞의 책, p.144. [본문으로]
  18. 앞의 책, p.291. [본문으로]
  19. 에릭 올린 라이트는 『분배의 재구성』의 서문에서 재분배라는 표현이 갖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지적한다. ‘재-분배’가 자본주의적 분배에 대한 의도적 개입을 의미함으로써, 분배 개념이 마치 자유로운 개인들의 교환의 산물인 것처럼 여겨지는 효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유의미한 비판이지만, 중요한 것은 분배라는 낡은 개념의 재구성(redesign)이 아니라 새로운 개념의 창안일 것이다. [본문으로]
  20. 네그리와 하트는 『커먼웰스』에서 공통적인 것을 자연적인 형태와 인공적인 형태로 나눈다. 자연적인 공통적인 것이 땅․광물․물․가스와 같은 생태적 영역에 있는 것이라면, 인공적인 공통적인 것은 언어․이미지․지식․정동․코드․습관․실천 속에 있다. 그러나 그들은 공통적인 것의 자연적 형태를 (주로 강대국이 약소국으로부터 수탈하는) 천연자원의 형태로만 여기는 태도는 불충분하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자연을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천혜(bounty of nature)’ 정도로, 그리고 ‘현존하는 부(existing wealth)’ 정도로 사고함으로써 공통적인 것이 생산되는 과정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공통적인 것을 동적인 것으로, 즉 노동의 생산물과 미래의 생산도구 모두를 포함한 것으로 사고할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공통적인 것에서는 자연과 문화라는 근대적인 구분이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 (앞의 책, p.139, p.250) [본문으로]
  21. 공통적인 것의 두 형태의 절합에 대해서는 M. Hardt, “Politics of the Common”을 참조하였다. [본문으로]
  22. M. Hardt, “Politics of the Common”. (http://kasamaproject.org/2009/08/02/hardt-politics-of-the-common/) [본문으로]
  23. 이 점은 특히 대학자본이 결합된 성미산 투쟁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것은 일견 ‘자연’을 둘러싼 생태론자와 개발론자의 싸움에 머무는 것으로, 그리고 마을공동체와 행정기구의 싸움에 머무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성미산 개발사업을 둘러싼 투쟁은 그 자금이 대학등록금으로 조성되었고 그 목적이 교육기관의 설립에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것의 두 형태가 교직되어 있는 투쟁이다. 이것은 자연보호와 마을자치 뿐만 아니라 대학자치와도 연결된다. [본문으로]
  24. 발터 벤야민, 「경험과 빈곤」, 『발터 벤야민 선집 5』, 최성만 역, 길, 2008, 174쪽. 경험과 가난, 새로운 야만성에 대한 네그리와 하트의 논의는 『제국』 287-293쪽을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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