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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2012 기본소득 국제대회 제1일 2부 청년의 무기, 기본소득과 점령운동 본문

쟁이다

[토론문] 2012 기본소득 국제대회 제1일 2부 청년의 무기, 기본소득과 점령운동

은혜 Graco 2016. 4. 3. 19:37



점령자, 해적, 그리고 기본소득 : 공통적인 것의 재전유를 위한 우리의 무기



  

직업운동가가 사라진 시대의 운동

촛불봉기가 한풀 꺾이면서 촛불사람들과 함께 앞으로의 활동방향을 모색하다가 기본소득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반가움과 의구심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질문들. 그 반응은 기본소득을 전도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들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뭔가를 좋은 것으로 인식시키려 노력하다보면, 그것이 어느 틈엔가 만능열쇠로 둔갑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기본소득이 도입되기만 하면식의 사고방식을 심어주게 될까 두려워 나는 이렇게 말했다.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것은 이 짓을 그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짓을 더 잘 하기 위해서다. 기본소득을 도입하는 순간 진짜 싸움이 시작된다.’ 여기서 이 짓은 또 다른 세계, 더 나은 삶을 위한 투쟁을 말한다. 때로는 촛불시위로, 때로는 점령으로, 때로는 해적질로 드러나는 우리의 투쟁 말이다.

촛불사람들이 저녁마다 생업을 끝내고 광장으로 모여들었던 것처럼 그리고 타흐리라이트들과 지구 각 지역의 점령자들이 생업을 미루거나 멈추고 광장을 점령한 것처럼, 오늘날 이른바 99%의 운동은 소수의 직업운동가(조직가)들이 다수의 대중을 동원하는 과거의 운동과는 사뭇 다르다. 이제 운동 속의 대중은 자신의 생업을 스스로 유연화(태업 혹은 파업)하면서 투쟁에 참여하고, 그 결과 자신의 삶 전체를 이전과는 전혀 다른 리듬으로 재구성하게 된다. 이는 청년들의 운동으로 좁혀서 살펴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아니, 그러한 발본적인 차이가 두드러지면 두드러졌지 결코 덜하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생업과 운동의 부조화, 즉 생업을 조절하면서 운동에 투신하는 형국이 필연적으로 가져올 수밖에 없는 좌절과 고통이다. 너무 많은 각오와 너무 많은 희생이 요구되는 상황 속에서 기본소득은 운동을 (기꺼운 방식으로)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좋은 해법이 된다.


 

청년-다중의 요구

그러나 기본소득의 형상을 이에 대한 해답 정도로 협소하게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기본소득은 한 달에 한 번씩 손에 쥐게 되는 화폐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최소 생계를 보장하는 복지 프로그램이상의 지평을 열어젖히는 것이 기본소득운동의 관건이다. 일전에 나는 이를 위해 ?삶정치적 기본소득을 위하여?라는 글에서,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가 주장하는 다중의 세 가지 요구지구시민권·보장소득·재전유권와 기본소득의 결합을 시도한 바 있다. 즉 보장소득과 상통하는 기본소득을 지구시민권과 재전유권이라는 다른 두 가지 요구와 결합시키는 것이다. 나는 기본소득이 개체그것이 사적인 것이든 공적인 것이든의 재생산에 머물지 않고 공통적인 것의 재생산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결합이 필수적이라고, 그리고 지구시민권과 재전유권 역시 기본소득(보장소득) 못지않게 다중에게 (특히 청년-다중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요구라고 생각한다.

먼저 지구시민권을 살펴보자. 지구시민권(the right to global citizenship)은 자본이 세워놓은 갖가지 사회적(물리적, 인종적, 젠더적, 문화적) 장벽과 위계를 무너뜨려 자본에게 빼앗겼던 공간의 자율을 되찾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지구시민권이라고 해서 단지 자유로운 해외 이주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global’한 시민권을 요구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지구적인(지구라는 행성 차원의 planetary) 외연적 시민권뿐만 아니라, 위계의 철폐를 의미하는 내포적 시민권(혹은 시민권의 강도 intensity) 또한 포함하고 있다. 이로써 지구는 하나의 메트로폴리스로 사고되기 시작한다.

청년들은 지구라는 이 거대한 메트로폴리스 속에서 자율적인 사회적 이동 및 이주를 욕망한다. 이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이동 및 이주에 그치지 않고 수많은 마주침들과 관계들을 낳는다. 그 마주침들과 관계들은 다양하고 특이한 지식, 정보, 이미지, 코드, 정동 등 공통적인 것의 조건이자 산물이다. 이동 및 이주에 대한 강조는 부르주아적 의미에서의 계층 간의 이동(이른바 개천에서 용 날 가능성’)을 활성화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지구시민권은 개인의 뛰어남으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계층이라는 틀로 환원될 수 없는 월경과 횡단 그리고 점령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지구시민권이 공간의 자율을 되찾기 위한 것이라면, 재전유권(the right to reappropriation)은 공통적인 것의 자율적인 운영을 되찾기 위한 것이다. 이제까지 자본이 공통적인 것을 파괴 또는 통제해온 방식 중 가장 두드러졌던 것은 바로 각종 사유화이다. , 가스, 수도, 전기, 교통 등 공공인프라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수많은 지식, 정보, 이미지, 정동 등을 사유화하려는 시도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금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여 있는 제주 강정마을의 경우는, 주민들과 자연환경이 맺는 관계를 파괴하고 땅과 바다를 사유화하려는 시도이다. 토지와 바다를 수용하는 주체가 해군일 뿐 여타의 사유화와 다를 바가 없다.)

접근권이라고 바꿔 부를 수 있는 이 재전유권 역시 청년들과 매우 밀접한데, 특히 지적소유권의 강화와 교육의 부패는 오늘날 전지구적인 청년들의 화두이다. 오늘날의 생산이 곧 공통적인 것의 생산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지적소유권의 강화(각종 저작권, 상표권, 특허권과 최근 웹을 발칵 뒤집어놓았던 온라인해적행위금지법 SOPA )는 생산의 원료이자 수단을 봉쇄하는 것이며 교육의 부패(등록금, 대학기업화, 금융위기 이후 미주와 유럽 등지에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공교육 예산삭감)는 자본으로부터 자율적인 주체성의 생산을 봉쇄하는 것이다. 공통적인 것이 생산적 힘이자 그 산물이 된 오늘날, 지식과 교육에 대한 접근은 단순히 써비스를 제공받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수탈된 것을 되찾는 것일 뿐만 아니라 생산수단의 재전유이기도 하다.


 

점령자, 해적, 그리고 기본소득

그럼 이제 청년-다중의 세 가지 요구들이 어떻게 결합되어 어떤 화학반응을 일으키는지 살펴보자. 먼저 기본소득과 지구시민권의 접속은 기본소득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라는 문제와 연결되어있다. 이 접속은 기본소득운동의 궤적 속에 이미 들어있다. 한편으로는 기본소득의 핵심적 덕목인 무조건성심사와 노동의무가 없이 지급되는이 시민권의 강도를 보장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기본소득운동의 지구적 네트워킹이 시민권의 외연을 조금씩 확장시키고 있다. 즉 기본소득과 지구시민권은 국가간 경계와 사회적 위계라는 두 가지 분할선을 모두 넘어서는 문제인 것이다.

여기서 국내외 점령자들의 존재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타흐리르 광장에서 월스트리트로 그리고 다시 전지구의 광장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점령운동은, 외연적으로는 기본소득운동이 흘러다닐 수 있는 전지구적 회로를 마련하고 있으며 내포적으로는 과거의 계급론으로 포착될 수 없는 다양한 주체들의 합류를 돕고 있다. 그리고 기본소득은 점령운동의 지속가능성 또는 재생산가능성을 보장할 수 있다. 이는 점령자들의 생계가 안정되어 운동이 좀더 수월하게 진행될 것이라는 전망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이제껏 자본의 리듬대로 살아왔던 사람들이 교환가치를 획득하는 데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도록 (달리 말해 아직-아닌-점령자들이 점령에 동참하도록) 도울 것이라는 전망을 의미한다. 이처럼 점령운동과 기본소득은 상호보완적인 관계 속에서 서로를 상승시킨다.

다음으로 기본소득과 재전유권의 접속은 기본소득으로 무엇을 줄 것인가라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나는 앞서 소개한 글에서, 수탈당한 것을 되찾는 데 있어 소유권이 아닌 접근권을 주장해야 하며 화폐형태로 지급되는 소득뿐만 아니라 공통적인 것에 대한 무조건적 접근권역시 소득으로서 쟁취해야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리고 지적소유권의 강화와 교육의 부패에 맞선 싸움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제시했다. 국내외 해적들의, 특히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끝날 수 있는 해적행위를 집단적인 운동으로 조직해낸 해적당의 행보가 의미심장해지는 지점이다.

해적운동과 기본소득 역시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해적운동은 그 자체로 소유관계와 가치척도에 균열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기본소득과 일치하며, 기본소득이 해적운동과 결합될 때 비로소 우리는 화폐가 아닌 형태의 기본소득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해적운동 역시 기본소득과 결합함으로써 해적들의 딜레마를 현실적으로 타개할 수 있다. 현재의 컨텐츠 생산-유통-소비 구조 속에서 해적행위는 본의 아니게 대자본과 소생산자 모두에 균열을 가져온다. (‘굿 다운로더캠페인이 바로 소생산자를 인질로 삼아 굿 다운로드, 제값 내고 소비하기를 강요하는 자본과 국가의 대표적인 술수이다. 그런데 제값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긴 하는 건가?) 기본소득은 컨텐츠 생산자들의 자립과 해적행위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할 것이며, 이로써 해적행위가 이른바 팀킬이 될 여지는 사라지고 해적들은 오로지 자본 및 국가의 해적으로서만 남게 될 것이다.



운동들에서 운동들의 운동으로

우리는 근대적 정치경제학 용어집의 맥락에서는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다. 더 이상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되어있다는 의미에서의 무산자가 아닌 것이다. 우리의 시대는 인간이 곧 생산수단이 되어가고 있는 시대이며, 그런 의미에서 탈근대적이다.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 정보, 아이디어, 정동, 관계 등이 곧 생산수단이 되어 또 다른 지식, 정보, 아이디어, 정동, 관계 등 생산물을 낳는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의 생산에 대한 자율적이고 민주적인 운영을 완전히 마련하지 못한 지금, 그 자체로 생산수단인 우리 자신은 자본과 국가의 압력 앞에서 휘청대기 일쑤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프레카리아트, 즉 불안정한 프롤레타리아트인 것이다.

나는 공통적인 것의 생산에 대한 자율적이고 민주적인 운영의 실마리를 기본소득에서 찾았다. 그리고 이제 기본소득을 씨줄로 삼아 한쪽에는 지구시민권과 점령운동이라는 날줄을, 다른 쪽에는 재전유권과 해적운동이라는 날줄을 감을 것을 제안한다. 이렇게 재구성된 기본소득운동은 임금노동자 중심의 노동운동으로도, 당사자 중심의 신사회운동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그럼으로써 공통적인 것의 생산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당사자가 되는 새로운 운동이다. 기본소득운동, 점령운동, 해적운동, 학생운동, 젠더운동 등 각각의 분과운동들로 존재하던 것에서 운동들의 운동으로 변모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금융자본주의를 점령하고 공통적인 것을 재전유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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