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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적 삶의 기쁨 ㅡ 김훈, <밥벌이의 지겨움> 본문

베끼다

아날로그적 삶의 기쁨 ㅡ 김훈, <밥벌이의 지겨움>

은혜 Graco 2016. 4. 3. 20:41




아날로그적 삶의 기쁨 | 김훈



한평생 연필로만 글을 쓰다보니, 잡지사 편집자들로부터 눈총을 받고 산다. 아무래도 컴퓨터로는 글이 써지지 않는다. 컴퓨터를 배우려고 한 번도 노력해 본 적이 없다. 그 물건의 편리함을 모르지는 않지만, 그 누르면 나오는 물건을 볼 때마다 왠지 나하고는 인연이 없는 것 같아서 나는 컴퓨터 배우기를 포기해 버렸다. 팔자에 없는 짓은 원래 하지 않는 게 좋다.


연필로 글을 쓰면 팔목과 어깨가 아프고, 빼고 지우고 다시 끼워 맞추는 일이 힘들다. 그러나 연필로 쓰면, 내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든다. 이 느낌은 나에게 소중하다. 나는 이 느낌이 없이는 한 줄도 쓰지 못한다. 이 느낌은 고통스럽고도 행복하다. 나의 몸의 느낌을 스스로 조율하면서 나는 말을 선택하고 음악을 부여하고 지우고 빼고 다시 쓰고 찢어버린다.


내 몸이 허락할 때, 나는 내 맘에 드는 글을 쓸 수가 있고 내 몸이 허락하지 않는 글을 나는 쓸 수가 없다. 지우개는 그래서 내 평생의 필기도구다. 지우개가 없는 글쓰기를 나는 생각할 수 없다. 지워야만 쓸 수 있고, 지울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므로 나는 겨우 두어 줄씩 쓸 수 있다. 그래서 원고를 몇 장 쓰고 나면 내 손은 새까맣게 더러워진다. 나의 글쓰기는 아날로그의 글쓰기다. 


아날로그는 이제 낙후된 삶의 방식이다. 아날로그는 다 죽게 되어 있다. 아날로그는 더 이상 디지털 문명의 대안이 될 수가 없다. 아날로그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모든 슬픔과 기쁨, 고난과 희망을 챙겨서 간다. 디지털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곧바로 간다. 그래서 디지털은 앞서가고 아날로그는 시대의 뒷전으로 밀려난다. 나는 아날로그가 끌고 나가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의 고난과 희망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악기를 연구하는 인간은 아름답다. 그는 선율과 박자 위에, 지금까지 없었던 세계를 빚어낸다. 그가 빚어내는 세계는 연약하고 정처 없는 것이어서, 음들은 태어나는 순간에 시간 속에서 소멸한다. 하나의 음이 소멸하고 또 다른 음이 태어나 그 뒤를 물고 이어지면서 다시 소멸한다. 


선율을 그렇게 해서 시간 위에 뜬다. 떠서 출렁거리면서 흘러간다. 선율이 흔들릴 때 세계는 흔들리고, 이 세계의 철벽같은 강고함에는 구멍이 뚫린다. 그리고 그 흔들림 속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인간은 살아 있다. 없었던 세계가 홀연 시간 속에 등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음악은, 그리고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결핍의 소산인 것만 같다. 스스로의 결핍의 힘이 아니라면 인간은 지금까지 없었던 세계를 시간 위에 펼쳐 보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상상력은 스스로의 결핍에 대한 자기 확인일 뿐이다.


악기는 인간의 몸의 일부로써만 작동한다. 인간의 몸이 아니면, 그 악기로부터 소리를 끌어낼 수가 없다. 타악기는 팔의 일부이고 관악기는 호흡의 일부이며, 건반학기, 현악기가 다 몸의 일부이고 성악은 몸 그 자체이다. 그래서 모든 악기는 인간의 몸과 친숙하게 사귈 수 있는 물리적 구조로 태어난다. 


가야금, 거문고, 기타,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하프 같은 현악기들은 인간의 몸에 안기기 편안한 구조를 갖고 있다. 연주자는 악기를 안거나 무릎 위에 올려놓고 켠다. 그 악기의 구조는 여성성을 연상시킨다. 악기는 기계가 아니라, 몸 그 자체인 것이다.


소리를 내지 않고, 단지 진열되어 있는 악기들도 인간에게 안겨서 소리를 내고 싶어 하는 그 운명만으로도 아름답다. 서울 국립국악원의 국악기박물관에 가면 이처럼 아름다운 악기들을 하루 종일 볼 수 있다. 이미 연주법이 전승되지 않는 현악기들도 있다. 당비파가 그러하다. 악기는 전하지만, 그 연주법이 전하지 않아서, 악기는 더 이상 인간에게 안기지 못하고 악기는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는다. 이런 악기들도 그 속에 소리의 잠재태와 소리의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는 한 죽은 악기는 아니다. 악기는 살아서, 기나긴 잠에 빠져 있다. 그러나 죽은 것은 아니다. 


모든 관악기는 인간 몸의 숨소리의 변형이다. 서양의 금관악기들은 이 숨소리를 기계적으로 변형시키지만, 동양의 목관악기들은 이 숨소리를 기계적으로 변형시키지만, 동양의 목관악기들은 이 숨소리를 숨소리 그 자체로서 세상에 내보낸다. 그래서 동양 목관악기 소리는 인간의 흐느낌과 호흡의 맥박을 그대로 드러내 보인다. 동양 목관악기에서는 대숲의 스치는 바람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는 그 악기를 부는 사람의 내면의 호흡이다.


타악기는 그 악기를 이루는 재료의 소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타악기는 그 재료와 인간의 힘이 부딪치는 소리다. 북은 쇠가죽의 소리고 징은 쇠의 소리고 편경은 돌의 소리고 목어는 나무의 소리다. 그래서 북소리는 쇠가죽과 인간의 교감이 빚어내는 소리인 것이다.


살아 있는 인간의 몸이 악기 속으로 연장되면서, 악기가 인간의 몸속에서 살아나면서 소리를 낸다. 그래서 모든 음악은 인간의 몸의 소리인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의 시간과 생명이 스스로의 결핍을 힘으로 삼아서 소리를 낸다. 그리고 몸과 악기의 교감의 원리는 오직 아날로그의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그러하되, 악기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그 구멍과 줄과 떨림판과 건반 어디에도 소리의 흔적은 없다. 악기는 소리의 집이지만, 소리는 그 집에서 살지 않는다. 소리는 어디에 있느냐, 소리는 어디에서 태어나 어디에서 죽느냐. 나는 소리의 거처를 알지 못한다. 그 거처를 알지 못하지만, 소리는 악기과 그 악기를 연주하는 인간의 몸 사이에서 아날로그 방식으로 태어나고 죽는다. 문질러야 소리가 나오고 불어야 소리가 나오고, 손가락을 놀려서 바람구멍을 막고 열어야 소리는 춤을 춘다. 소리의 춤은 아날로그의 춤이다.




나는 몸을 써서 하는 일에 익숙지 못하다. 나는 공부를 잘하지 못한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책을 많이 읽지 못한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자본론󰡕의 각주를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망치를 들고 못을 박을 때, 못이 휘는 일을 부끄럽게 여긴다. 톱으로 나무를 자를 때, 톱 지나간 자리가 가지런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 나는 창피하다. 삽으로 땅을 파서 김장독을 묻을 때, 삽날이 땅 속에 깊이 박히지 못하는 일을 나는 수치스럽게 여긴다.


일을 잘하지 못하는 나의 수치심은 온갖 연장을 사서 모으는 댄디 취미로 발달해 있다. 그래서 나는 날카롭고 뾰족한 연장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한때는 이 연장들을 무슨 명품처럼 거실 벽에 진열해 놓기도 했었다. 나는 악기의 생김새를 사랑하듯이, 이 세상 모든 연장의 날카로움과 그 작동 원리를 사랑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연장은 톱, 망치, 펜치, 니퍼, 드라이버, 스패너, 대패, 작두, 써레 같은 것들이다. 드라이버나 펜치 같은 한 종목 안에서도 크고 작은 것, 뭉툭하거나 뾰족한 것, 얇은 것과 두꺼운 것, 날카로운 것과 무딘 것들이 다 따로따로인 것이어서 내가 가진 연장은 100여 가지가 넘는다. 


연장은 악기처럼 몸의 일부다. 연장은 이 세계를 개조하고 거기에 흔적을 남기려는 인간의 열망의 소산이다. 그래서 망치를 들고 못을 박을 때, 나의 몸은 나무에 저항하고 못에 저항한다. 못과 나무도 나의 몸에 저항한다. 망치가 그 양쪽의 저항을 일련의 흐름으로 연결시켜 주면서 나의 ‘못 박기’ 동작은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못 박기’는 내 생명의 축제인 것이다. 


톱질과 땅파기도 다 마찬가지다. 그때 망치와 톱과 삽은 내 몸의 일부다. 나는 내 몸과 연장의 교감으로써 이 세계와 교감하고 거기에 맞선다. 이 세계는 망치와 톱에 와 닿는 질감을 통해 내 몸 속으로 흘러든다. 세계가 내 몸 속에 가득 차서 넘친다. 나는 세계로부터 소외당하지 않는다. 이 친화의 긴장은 팽팽하고 부드럽다. 그래서 가끔씩 마당에 나와서 사과궤짝을 부수어 개집도 만들고 화분도 만든다.


망치로 못을 칠 때는 못대가리를 수직으로 내리찍어야 한다. 이 수직의 각도가 어긋나면 못은 똑바로 박히지 않는다. 어긋난 상태에서 계속 망치질을 하면 못은 휜다. 망치로 못대가리를 때려서 차츰 나무속으로 밀어 넣을 때, 나무의 여러 질감들―나무마다 못이 박히는 질감은 다르다―이 내 몸 속에 와서 내 몸의 일부가 된다. 바싹 마른 나무에 못을 박을 때는 위태롭다. 나는 그렇게 해서 나무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이 이해는 비로소 완전한 것이다. 이 이해는 분석되거나 재구성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망치로 못을 박는 순간에만 이 이해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못 박기를 끝내면 이 이해의 기쁨은 소멸한다. 그래서 못을 박는 일은 악기를 연주하는 일과 같다. 그러니 못이 휠 때 내가 느끼는 부끄러움은 크다. 이 부끄러움은 아날로그 세상의 부끄러움인 것이다.




개를 데리고 산보를 할 때, 나는 개 다리의 움직임에서 아날로그적 삶의 기쁨을 느낀다. 개 한 마리가 나에게 주는 행복만으로도 나는 오래오래 이 세상에서 살고 싶다. 개 자리가 땅 위에서 걸어갈 때, 개 다리는 땅과 완벽한 교감을 이룬다. 개의 몸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다리가 땅을 밀어내는 저항이다. 개의 몸속에 닿는 이 저항이 개를 달리게 하는데, 이 저항이야말로 개의 살아 있음이다. 개 한 마리가 이 세상의 길 위를 달릴 때, 이 세상에는 놀라운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개를 데리고 공원에서 달릴 때 나와 개가 똑같은 아날로그의 짐승임을 안다. 나는 개와 아무런 차이가 없는, 아날로그 세상의 네발짐승인 것이다. 내 콧구멍에서 김이 날 때, 개 콧구멍에서도 김이 난다. 이 세상의 길바닥을 헤매고 다닌 개의 발바닥에는 굳은살이 박여 있고 내 발바닥에도 굳은살이 박여 있다. 이 굳은살은 각질로 금이 가 있고, 거기에 때가 끼어 있기도 하지만, 나는 사람이나 개의 몸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부분은 발바닥의 굳은살이라고 생각한다. 그 굳은살은 말랑말랑하지도 않고 딱딱하지도 않다. 그 굳은살은 개나 사람이 이 세상을 딛고 다닌 만큼 단단하거나, 아직 덜 딛고 다닌 만큼 말랑말랑하다. 그래서 개 발바닥의 굳은살은 한 편의 역사를 이루는데, 이 역사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보다 훨씬 더 직접적이다. 그 역사는 해독하기 어려운 역사인데, 그것이 해독하기 어려운 까닭은 그 역사가 세상과 개 사이에만 이루어진 시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개의 발바닥이나, 두 갈래로 갈라진 돼지 발바닥, 소 발바닥을 들여다볼 때마다 그 존재들의 개별적 삶의 역사를 생각하면서 목이 멘다. 그리고 못대가리가 휠 때마다 세상과의 교감에 이토록 서툰, 내 생명의 초라함에 문득 놀란다. 아날로그 세상의 슬픔과 기쁨은 등불처럼 환하다. 


한 그릇의 음식도 완전한 아날로그적 방식으로만 이 세상에 태어난다. 나는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의 착한 마음과 그 놀라운 상상력을 사랑한다. 음식은 재료와 재료 사이의 교감으로 태어난다. 그러므로 된장찌개는 하나의 완벽한 새로운 세계다. 재료들 사이의 교감으로, 지금까지 이 세상에 없었던 ‘국물’이라는 완연한 세계가 입 속에서 살아난다.


불은 또 어떤가. 불은 재료와 재료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서 서로 끌어당기고 밀어내게 한다. 불은 재료들의 질감을 국물 속으로 끌어낸다. 레인지 위에서 끓는 된장찌개를 들여다보면서, 나는 불과 재료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내밀한 작용들을 여전히 알지 못한다. 사람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찌개가 저 혼자서 끓고 있다. 


소파에 앉아서, 부엌에 된장찌개가 끓는 소리를 들을 때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에서 끓고 있는 된장찌개로부터 소외되지 않는다. 나는 내 몸 속에서, 불과 물과 찌개 재료들의 밀고 당김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그 작동 방식을 나는 안다. 내가 나무에 못을 박을 때 느끼는 삶의 작동 원리를 다른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처럼, 된장찌개는 저 혼자서 끓는 것인데, 이 격절은 연대된 격절이다. 아날로그의 원리가 이 격절에 연대를 부여한다. 한 줄로 잇닿게 하는 것이다.


여자 사랑하기를 좋아하는 내 바람둥이 친구는 “연애란 오직 살을 부비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아, 저렇게 간단한 것을 몰라서 이토록 헤매었다는 말인가 싶었다.


살은 오직 아날로그 방식으로만 작동한다. 나는 살의 아날로그를 자세히 쓸 힘이 없다. 그것은 아직도 내 언어의 힘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살의 아날로그는 언어와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언어의 반대말은 ‘살’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모르기는 해도, 살 역시 악기나 연장의 작동원리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두려운 것은 이 ‘살’이 타인의 ‘살’과의 관계 속에서 작동한다는 점이다. 그 대복을 나는 내가 힘이 있을 때 한번 써 볼 생각이다. 그러나 쓰지 못하면 또 어떠랴. 살은 언어의 영역이 아닌 것을.


살이여, 아날로그의 편인 살이여, 그때까지 조용히 있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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