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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제연구소 팝업세미나 ‘계급과 차별의 권력, 교차해서 읽기’ 후기 본문

쟁이다

역사문제연구소 팝업세미나 ‘계급과 차별의 권력, 교차해서 읽기’ 후기

은혜 Graco 2021. 6. 3. 14:44

 

2020. 12. 28

역문연 광장

 

 

언젠가부터 한국에서도 젠더·섹슈얼리티 담론과 운동을 통해 교차성이라는 개념이 비중 있게 다뤄지기 시작했다. 나는 의식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교차성이란 반드시 방어되고 추구되어야 할, 세계를 바라보는 어떤 태도로 생각해왔다. 그러던 와중에 발견한 이번 팝업 세미나는, 단순히 지지하거나 지향하는 차원을 넘어 당사자의 언어와 이론적 개념을 통해 교차성을 좀 더 면밀히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전형적인 학술서인 <지구화 시대의 정의>(낸시 프레이저, 2010), <젠더와 민족>(니라 유발 데이비스, 2012)에서 당사자의 육성이 살아 있는 <어쩌면 이상한 몸>(장애여성공감, 2018), 그리고 당사자의 언어와 이론적 개념의 앙상블이 돋보이는 <퀴어 페미니스트, 교차성을 사유하다>(비사이 콜렉티브 외, 2018)(개인적으로 주저함 없이 인생의 책으로 꼽는) <망명과 자긍심>(일라이 클레어, 2020)까지. 이번에 함께 읽은 책들은 교차성이라는 키워드로, 그 중에서도 젠더·퀴어·장애를 중심으로 묶어볼 수 있다.

 

지금 세미나 후기를 쓰고 있는 , 시스젠더 헤테로섹슈얼 비장애인이자 외모와 언어에 위화감이 없는 모태 한국인이며 도시 하층민 출신의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으로 소기업 정규직이면서 코로나 시대의 최상위 노동계급이라는 원격근무 노동자다. 이 빽빽한 자기소개 한 문장에는 자기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매우 다양한 교차로가 그어져 있다. 우리가 입에 달고 사는 란 이토록 복잡하고 유동적이고 잠정적인 존재이며, 갖은 마주침과 길항의 산물이다.

 

세미나 초기에 나는 정상성을 지닌 사람(the normate)으로서 내가 잘 모르는 장애와 퀴어에 대해 많이 배우겠다는 포부로 세미나에 임했다. (이런 마음가짐은 실은 한국 사회의 슬픈 자화상이기도 한데, 그만큼 장애인과 퀴어가 비가시화되어 있어 생애주기에 걸쳐 친구나 이웃으로서 서로를 알아갈 기회가 희박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세미나를 해나가면서 받은 느낌은 조금 달랐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장애나 퀴어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기보다 오히려 정상성을 지닌 사람과 장애/퀴어를 지닌 사람이 별로 다르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만연한 성범죄, 저출담론, 임신중지권 투쟁 등으로 재생산''은 무시당한 채 재생산''만을 착취당하는 여성들의 처지가 어느 때보다 이슈화되고 있는 지금, <어쩌면 이상한 몸>에 담겨있는 장애여성들의 성차별, 성폭력,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의 경험담은 (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비장애여성이 겪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퀴어 페미니스트, 교차성을 사유하다>에서 다뤄지는 아픈 몸퀴어한 몸을 곱씹을 때는, 무색·무취·무욕의 투명인간 같은 존재로 상정되기 일쑤인 노인의 몸과 오버랩되기도 했다.

 

재생산 문제에서, 비장애여성들은 출산에 대한 압박을 받지만 장애여성들은 출산하지 말 것을 종용당한다. 그리고 장애 유무를 떠나 혼외 출산은 정서적으로나 제도적으로나 철저히 외면당해왔다. 몸의 문제에서, 퀴어는 기이할 정도로 과잉성애화되지만 노인은 당연하다는 듯 과소성애화된다. 그리고 여성은 입맛에 따라 과잉성애화(헤픈 년, 꽃뱀)와 과소성애화(순진무구한 처녀)를 오가는데, 이런 이중 잣대는 손쉽게 자기결정 능력이 폄하되곤 하는 장애여성에게 훨씬 가혹하게 널을 뛴다.

 

입맛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며 내쳐지는 젠더와 장애와 퀴어. 그 입맛은 과연 누구의 입맛일까? 너무나 뻔한 대답이지만, 권력의 입맛이다. ‘권력이라는 너무 당연해서 감흥조차 없는 추상적인 단어를 꺼내들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 시대의 투쟁에는 김수영 시인의 시처럼 그림자가 없기 때문이다. 적을 특정할 수 없는 시대의 적대는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는데, 교차성이 빛을 발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과거 적대를 위한 피아식별에서 끝없이 배제되고 유예되어야 했던 경계인 혹은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교차인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것.

 

그래서 개인적으로 이번 세미나를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은 권력과 불화하는 우리의 공통점을 발견한 것이었다. 아직도 다름과 틀림을 혼동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한국 사회에서 너무 이른 주문일지는 모르겠으나, 다름을 파고드는 것을 넘어 우리가 실은 별반 다르지 않음을 발굴하는 단계로 나아갈 때가 아닐까 생각된다. 교차성의 목표는 구별짓기와 배제가 아니라 교차 자체에 있으므로. 일라이 클레어의 말처럼, “정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매우 평범하고 친숙한 것이 되는 것이므로.

 

다시, 문제의 로 돌아가보자. 앞서 내가 나를 소개하며 늘어놓은 인구학적 정보 위로 수많은 교차로가 겹겹이 쌓여있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실천은 무엇일까. ‘를 가장 잘 드러내는 교차로 하나를 선택하는 것? 가장 덜 부각된 교차로를 조명하는 것? 아니면 가장 먹히는 교차로에 힘을 보태는 것? 모두 다 유의미한 정치적 실천이지만, 나는 그보다 훨씬 더 발본적인 실천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나라는 존재가 역사적 구성물이자 구성 과정임을, 주어진 것이든 자임한 것이든 현재의 내 정체성이 언제든 변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차이 속 공통성으로서의 교차성이자, 눈앞에 놓인 우리의 최전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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