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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간 속에서 ‘다르게’ 욕망하기 (문학3, 2018/04/04) 본문

쟁이다

‘다른’ 시간 속에서 ‘다르게’ 욕망하기 (문학3, 2018/04/04)

은혜 Graco 2018. 12. 3. 17:22


기본소득-예술-(척도)

‘다른’ 시간 속에서 ‘다르게’ 욕망하기



예술의 측정불가능성 


예술인/창작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상반된 시선이 존재한다. ‘(그래도) 좋아하는 일 하면서 살잖아’라는 부러움 섞인 시선과 우화 속 베짱이나 룸펜 바라보듯 하는 야유의 시선. 이들도 조금 불규칙할지언정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써서 뭔가를 생산하는 사람인데, 그리고 단속적이지만 계약을 통해 소득을 창출하기도 하는데 왜 유독 이런 양가적인 시선을 받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예술/창작 활동의 측정불가능성 때문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예술은 노동/비노동의 점이지대에서 명맥을 이어온 아주 독특한 생산부문이었다. 이것은 오늘날 생산양식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이른바 ‘비물질적 생산’[각주:1]의 원형과도 같다. 생산과정과 생산물 모두 비물질적이기 때문에 시간의 척도로 측정이 불가능한 생산활동 말이다. 물론 ‘문화산업’이라는 이름으로 예술이 산업화되고 기술의 진보로 저장매체가 발달함에 따라 인쇄물, 필름, CD 등의 외형을 띠게 되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캐리어’일 뿐 본질은 그 속에 담긴 내용(컨텐츠)―어떤 수행과정(퍼포먼스)과 이를 통해 구현되는 지적・정동적 요소들―이다.  


그래서 과정과 결과물이 모두 비물질적인 예술(인)의 시간은 일반적인 노동시간과 다르다. 출퇴근 개념도 없고 개인으로서의 생활과 창작활동의 경계도 모호하다. 의뢰가 있을 경우 한시적인 계약관계를 맺기는 하지만, 하루하루 일정한 노동시간을 제공할 필요는 없다. 결과물만 내놓으면 될 뿐, 결과물이 나오기까지의 시간은 오로지 본인의 의지대로 조직하고 관리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술에서는 노동시간이라는 척도도 고용관계도 성립하지 않는다. 


예술의 이런 측정불가능성(탈척도)으로 인해, 예술인은 한편으로는 자유롭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정한 상태에 놓인다. 특히나 예술이 산업화를 넘어 금융화(투자, 경매, 저작권 등 재테크로서의 예술)되는 지경에 이른 오늘날, 예술인이 자본의 포섭에서 벗어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본인의 생계와 작품활동을 지속가능한 것으로 만들려면 자본의 요구나 시장 트렌드에 맞춰야 하고, 자신의 작품세계와 자율성을 고수하려면 극도의 불안정성으로 내몰리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기본소득은 이렇게 서로 배타적인 것으로 존재했던 예술(인)의 자율성과 지속가능성을 양립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노동의 예술화


그렇다면 예술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노동은 어떤가. 이제껏 노동은 척도의 세계에 존재했다. 노동은 일정한 시간(노동일)동안 일정한 장소(작업장)에서, 즉 고용관계 속에서 측정가능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대가 역시 노동시간을 척도로 삼아 임금의 형태로 지불되었고, 따라서 노동과 비노동의 구분은 너무나 확연했다. 이런 노동/비노동의 구분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부문은 가사노동이다. 가사노동은 남성=부양자 도식에 따라 그 대가가 남성노동자의 임금에 산입되는 것으로 가정된, 역사가 유구한 부불노동이다. 


그러나 오늘날 노동과 비노동의 구분은 희미해졌다. 고용과 임금이라는 체계가 여전히 작동하고는 있지만, 가치는 그 체계(척도)를 가볍게 뛰어넘어 전방위적으로 생산되고 있다. 가사나 돌봄처럼 애초부터 비노동으로 분류되어 오랫동안 배제되어온 생산활동도 있지만, 생산관계가 재편되고 기술이 혁신되면서 ‘측정불가능한 방식으로 생산적인’ (그래서 노동으로 분류되지 않는) 무수한 활동들이 새로 생겨났다. 


대표적인 것이 웹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상호작용들이다. 동영상을 보는 것, 댓글을 다는 것, 쇼핑을 하는 것 등은 고용되지 않은 불특정 다수가 자발적으로 수행하는 가치생산활동(노동)이다. 굳이 동영상을 재생하지 않아도, 댓글을 달지 않아도, 주문결제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호기심에 이끌려 웹페이지를 방문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는 이윤을 얻고 있으며, 우리가 매일매일 웹에 남기는 디지털 발자국은 그 자체로 데이터가 되어 상품으로 거래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마크 저커버그의 기본소득 지지 선언은 자신의 이윤이 어디에서 발생하는지 정확하게 인지한 데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수동적으로 발자국만 찍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능동적이다. 새로 나온 상품, 책, 영화에 대한 리뷰들이 하루에도 수백, 수천 건씩 생산되고 있고 주제별로 형성된 커뮤니티에서는 온갖 밈(meme)의 향연이 펼쳐진다. 이런 웹 게시물들이 또 다른 사람들의 발길을 이끌고 여기서 다시 광고수익 등 이윤이 발생한다. 이처럼 우리는 (여가라고 부르든 취미라고 부르든) ‘그냥 저 좋아서 하는 일’을 함으로써 부지불식간에 가치생산에 기여하고 있으며, 자본은 그것을 아무런 대가 없이 취하고 있다. 따라서 기본소득을 요구하는 것은 억지주장도, 인정에 대한 호소도 아니다. 기본소득은 오늘날의 생산양식, 오늘날의 정치경제학에 근거한 타당한 요구이다. 


이렇게 ‘좋아서 하는 일’, 오로지 ‘하고 싶다’는 욕망에 의해 추동되는 행위는 우리의 삶의 방식이 예술을 닮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웹상에서 이루어지는 비물질적 생산은 재미, 의미, 공감 같은 감성과 정서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예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좋아하는 일 하면서 살잖아’라는 말에는 ‘놀듯이 일하면서 뭐가 힘들다고 투정이냐’는 면박과 ‘나도 돈만 있으면 그렇게 살고 싶다’는 부러움이 뒤섞여있다. ‘좋아하는 일 하면서 살잖아’라는 말이 관용구처럼 사용된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예술 같은’ 삶을 욕망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속가능성과 자율성이 동시에 보장되는 그런 예술 같은 삶을.



척도를 벗어나


‘만일 나에게 기본소득이 주어진다면?’이라는 질문을 던지면, 덕후들은 더 많은 짤을 찌고 더 많은 드립을 개발하겠노라고 말할 것이다. 생계 때문에 덕질을 꿈도 못 꾸던 사람이라면 밥벌이에 대한 부담을 조금 내려놓고 소소한 덕질을 시작할 것이다. 인디밴드는 아르바이트를 줄이고 신곡 만들기에 집중해 공연 레퍼토리를 늘려나갈 것이고, 대학원생은 과외나 교수 뒤치다꺼리에 빼앗기던 시간과 에너지를 모아 학위논문에 투여할 것이다. 기본소득이 일으킨 균열의 틈 사이로 이런 덕질, 노래, 논문 등이 새어나올 것이며, 이 생산물은 다시 다른 예술/창작의 재료나 영감으로 작용할 것이다.  


기본소득은 통장에 다달이 꽂히는 금액으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돈 이 아니라 ‘시간을 다르게 쓸 수 있다’는 가능성의 열림 그 자체이다. 몇 시간인지는 중요치 않다. 척도의 시간은 가령 7530‘원’을 1‘시간’으로 단위만 바꾼 것일 뿐, 정말 중요한 것은 탈척도의 가능성이다. 물론 기본소득을 받는다고 해서 모두가 곧바로 척도의 세계(고용관계와 노동시간에 바탕을 둔 기존의 임금노동)를 벗어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개중에는 오랫동안 학습된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또는 자신이 세운 어떤 목표 때문에 저축에 더 박차를 가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불가능해서 못하는 것과 할 수 있는데도 안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핵심은 시간의 자율, 즉 시간 주권이다.


자신의 시간을 스스로 조직할 수 있다는 것은, 단순히 선택의 여지가 넓어진다거나 개인의 자유가 늘어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몸에 새겨져 있는 메트로놈 같은 시간 감각과 리듬을 바꿔놓을 엄청난 사건이다. 과거 노동자들의 장구한 투쟁을 통해 8시간 노동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처럼 (한국의 경우 아직 당연한 단계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것이 ‘바람직하다’는 관념은 형성되어 있다) 기본소득 투쟁을 통해 자본이 부과하는 척도로는 측정이 불가능한 시간이 새롭게 펼쳐질 것이다. 


낡은 질서를 찢고 나오는 새로운 시간. 어찌 보면 지금껏 예술이 독보적으로 담당해온 것도 이런 파열의 운동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제 이 파열은 비물질적 생산이 점점 예술을 닮아감에 따라 협의의 예술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체로 전면화되어 간다. 비물질적 생산이, 나아가 우리의 삶이 과거의 노동 패러다임을 버리고 예술을 닮아가는 것은 분명 아주 좋은 신호이다. 파열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기에, 되찾은 시간 주권을 행사하여 시간을 새롭게 조직하는 일종의 방법론이 발명되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자본의 질서에 맞서는 방식으로 시간을 조직할 수 있을지를 말이다. 


시간을 다르게 쓴다는 것은 결국 ‘다르게 욕망하기’를 의미한다. 시간 주권을 되찾았다 한들 우리의 욕망의 회로를 새로 짜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신자유주의 아래에 살던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기본소득을 통해 예술이 얼마간의 지속가능성과 자율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듯이, 우리는 예술과 예술을 닮아가는 노동(비물질적 생산)을 통해 ‘다른’ 시간과 ‘다른’ 욕망을 연습하고 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기본소득과 예술이 만날 때, 척도로부터 해방된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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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물질적 생산의 헤게모니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은혜, 「삶정치적 기본소득을 위하여」, 『진보평론』, 제45호, 2010. => http://failbetter.tistory.com/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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