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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혁명의 철학: 안토니오 네그리의 존재론과 주체론』, 히로세 준, 난장, 2018 본문

쟁이다

[후기]『혁명의 철학: 안토니오 네그리의 존재론과 주체론』, 히로세 준, 난장, 2018

은혜 Graco 2018. 5. 22. 22:41



옮긴이 후기



이 책을 처음 소개받았을 때 나는 제목만 보고 안토니오 네그리의 사상을 정리한 책이겠거니 했다(이 책의 원제는 『안토니오 네그리: 혁명의 철학이다). 하지만 책을 펴자마자 이 책이 얼마나 흥미롭고 야심찬 기획인지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자크 랑시에르를 시작으로 알랭 바디우, 에티엔 발리바르,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미셸 푸코, 그리고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까지, 목차에 내로라하는 정치철학자들의 이름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철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일본어와 영어를 조금 할 줄 아는 게 전부인 내가 이 책을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앞섰지만, 책의 매력에 이끌려 겁도 없이 덜컥 번역을 맡아버렸다.


번역을 마무리한 지금, 나는 우리 시대의 혁명을 사유하는 데 꼭 필요한 책을 번역했다는 생각에 기쁘기 그지없다. 혁명이 패션이 되고 혁명가가 상품이 되는 시대,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채굴해 부를 축적하는 소셜미디어의 창업주가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시대, 혁명 이론이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달고 교양과 자기 계발의 도구로 소비되는 시대. 바야흐로 자본이 코뮤니즘을 흉내 내는 시대에 혁명의 철학은 어떠해야 하는지, 혁명의 철학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이 책을 통해 실마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어판 제목을 혁명의 철학: 안토니오 네그리의 존재론과 주체론으로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자 히로세 준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네그리의 ‘혁명의 철학’의 열쇠는 존재론과 주체론,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존재론과 주체론을 무매개적으로 접합하려는 시도”(29쪽)이다. 히로세는 이런 접합의 계기가 결여된 철학과 그 계기가 살아 있는 철학을 나눠 논의를 전개하는데, 네그리를 일종의 벤치마크로 삼아 한편으로는 존재론/주체론이 결여된 ‘정치’철학(랑시에르, 바디우, 발리바르)을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존재론-주체론 접합의 방향과 방식의 차이(들뢰즈・가타리와 푸코)를 탐구한다.


그런데 정작 내가 이 책의 역자이자 이 책을 먼저 읽은 독자로서, 그리고 다른 삶과 다른 세계를 욕망하고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깊은 인상을 받은 부분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히로세가 철학을 ‘하는’ 방식, 즉 텍스트를 대하는 태도였다. 어떻게 하면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정확한 독해를 해낼 수 있을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조건에서 저항의 힘을 키우는 방향으로 독해를 해낼 수 있을지 고민하는 태도, 누가 맑스를, 레닌을, 혹은 스피노자를 제대로 읽고 있는가가 아니라 어떤 맑스 독해, 어떤 레닌 독해, 어떤 스피노자 독해가 우리의 삶과 역능을 강화할 수 있는가를 고려하는 그런 태도 말이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밝혔듯이, 히로세는 이 책을 “네그리 철학의 사용설명서”로 기획했고 한국에서도 나름의 정세 속에서 “네그리의 정치철학이 사용되기를 희망”하고 있다(11쪽). 이런 ‘사용’에 대한 감각은 철학을 훈고학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에게는 마뜩잖은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존재론을 저항의 힘을 긍정하는 데 사용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주체론을 권력 탈취가 아닌 역능의 발휘에 사용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히로세의 이 과감한 지적 모험에 동참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의 초역 작업은 2014~15년 사이에 이뤄졌다. 그때 나는 연구공간 L에 몸담고 있었고, 일주일에 한 번씩 논문, 비평, 번역 등 각자의 작업을 공유하는 모임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수개월에 걸쳐 이 책의 초역을 발표했고 오탈자부터 개념어와 번역어, 참고문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피드백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모임이 없었다면 분명 중간에 나가떨어져 초역 작업을 완수하지 못했을 것이다. 함께 마음과 시간을 써 준 세정, 승준, 현정, 희숙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이 책은 일본인 저자가 일본어로 쓴 것이지만, 다뤄지는 철학자들의 면면으로 알 수 있듯이 필연적으로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를 접할 수밖에 없는 책이다. 정치철학 전문가도 아니고 다국어 실력을 갖추고 있지도 않은 나를 믿고 번역을 맡겨주신 이재원 편집장님께 감사드린다. 편집장님의 노고 덕분에 이 책이 더욱 정확해지고 매끄러워지고 풍성해질 수 있었다. 더불어 편집장님을 도와 번역문을 검토해주신 김상운 선생님과 양창렬 선생님께도 감사를 표하고 싶다. 두 분의 격려와 지원 덕분에 많이 든든했고 더 좋은 책이 나올 수 있었다.


첫 일본어 번역서의 후기를 쓰고 있자니 일본어를 난생처음 배우던 무렵이 생각난다.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아서 배우기 시작한 일본어가 이렇게 쓰이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때부터 내심 불안하면서도 내색 한번 하지 않고 나의 한 걸음 한 걸음을 지켜봐준 가족들에게, 특히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인 할머니께 사랑과 감사를 보낸다. 끝으로 혁명의 철학에 눈을 뜨고부터 강의실에서, 토론에서, 광장과 거리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마주쳤던 수많은 스승들에게, 그리고 언제나 혁명의 철학을 앞질러 존재하는 분노와 반란의 현장에 연대의 인사를 전한다.



2018년 3월 26일

행신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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