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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맑스 재장전』, 제이슨 바커 엮음, 난장, 2013 본문

쟁이다

[후기] 『맑스 재장전』, 제이슨 바커 엮음, 난장, 2013

은혜 Graco 2016. 4. 3. 21:48



옮긴이 후기 



몇 해 전 웹서핑을 하다가 다큐멘터리 맑스 재장전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다. 유투브에서 본 맑스 재장전의 예고편은 레온 트로츠키와 칼 맑스를 대면시킨 애니메이션 도입부와 이어지는 대담자들의 면면만으로도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금융 위기’라는 말이 전지구적으로 어떤 위화감도 없이 통용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프로젝트가 등장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반가운 일이었다. 


그런데 정작 다큐멘터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본 것은 이 책의 번역을 맡고나서였다. 그리고 다큐멘터리를 보고나서 이 책의 출판이 꼭 필요하다는 확신이 생겼다. 


다큐멘터리는 예고편이 준 기대감에 비해 무난하고 다소 평이하 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복잡다단한 사유의 결을 따라가기보다는 선명하게 각인될 수 있는 입장만을 확인하는 정도에 그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TV용 다큐멘터리였기 때문에 러닝타임이나 시청자층에 대한 고려를 비롯해 여러 가지 제약이 틀림없이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다큐멘터리 속 여러 대담자들 중 가장 중요한 논의를 펼치고 있는 정치철학자 여덞 명의 목소리를 편집 없이 있는 그대로 전달해주는 이 책의 출판은 우선 다큐멘터리의 좋은 보완물이 된다는 점에서 꼭 필요한 기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책은 다큐멘터리와의 관련성과 별개로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흥미로운 기획이 아닐 수 없다. 맑스 재장전이라는 프로젝트의 배경에는 21세기에 나타난 두 가지 독특한 현상이 자리하고 있다. 하나는 2007~08년의 이른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라는 금융 위기로부터 촉발되어 전지구적으로 계속되고 있는 자본주의의 위기이고, 다른 하나는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서 코뮤니즘이라는 이념이 각광을 받고 있는 현상이다. 제이슨 바커는 다큐멘터리라는 틀에서 벗어나 이 책에서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여덟 명의 정치 철학자들과 함께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진단, 맑스라는 사상가에 대한 평가와 그의 사상이 갖는 현재적 의미, 그리고 코뮤니즘이라는 이념의 잠재력 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여기서 맑스를 전무후무한 자본주의 분석가로서는 긍정하지만 코뮤니즘과 주체로서의 인간의 행동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존 그레이를 제외하면, 나머지 대담자들은 맑스의 사상을 긍정하고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나름의 방식으로 재창조하고 있다. 이들은 맑스가 정교화한 개념들 중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용한 개념들이 무엇인지 선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개념들을 현재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세계의 물질적 조건에 적실하도록 변형시키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것은 동시에 현실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오염된 20세기 코뮤니즘과의 결별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맑스 재장전은 마치 유물을 복원하듯이 맑스의 사상을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복원해내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맑스를 창조하는 작업인 것이다. 


이들 중 ‘맑스 재장전’을 가장 일관되고 철저하게 진행해온 사람은 단연코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일 것이다. 바커가 각 대담자들에게 제기하는 질문들은 실제로 네그리와 하트의 자본 분석과 정치적 기획에 꽤 많이 기대고 있다.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 이윤에서 지대로의 이행,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이라는 이원구도에서 공통적인 것으로의 이행, 자유주의와도 사회주의와도 다른 것으로서의 코뮤니즘 등은 네그리와 하트가 ‘제국’ 3부작의 마지막 책인 공통체(2009)와 최근작 선언(2012)에 이르기까지 계속 다듬어온 이론들이며, 그 뿌리에는 언제나 맑스가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오랫동안 맑스를 재장전해온 네그리와 하트가 말하는 코뮤니즘이란 과연 무엇일까? 네그리와 하트가 말하는 코뮤니즘은 바로 ‘공통적인 것의 운영’이다. 가령 하트는 사적 소유와 자본주의가 양립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마치 봉건적 소유관계가 생산성에 족쇄가 되어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일어났듯이, 오늘날에는 “사적 소유라는 지배적인 관계가 더 이상 성장을 추동할 수 없으며 사실상 성장을 방해”(53쪽)하고 있기에 코뮤니즘으로 나아가야 하며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역시 이와 비슷한 주장을 펼친다. 지젝은 지식이 물질적 형태의 재산과 달리 공유하는 즉시 소진되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공유될수록 더 풍성해진다는 점을 들어 반자본주의적 상품이라고 규정한다. 그래서 지젝은 오늘날 지식의 사유화가 점점 불가능해 지고 있다는 데서 자본주의 종언의 근원을 발견한다. 나아가 지젝은 20세기 코뮤니즘, 즉 사회주의의 중앙집중적 계획과 대비되는 “우리가 공통재를 다룬다는 의미에서의 코뮤니즘”(102쪽)을 제시한다. 


한편 알베르토 토스카노는 공통적인 것이라는 개념에 대해 양면적 태도를 갖고 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공통적인 것이 그 자체로 해방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오늘날에는 자본주의조차도 협력적이고 공통적인 것을 미덕으로 삼으며 그것을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토스카노의 이런 지적은 매우 타당하다. 이것은 코뮤니즘이 공통적인 것의 운영인 이유와, 달리 말해 ‘공통적인 것이 운영되어야 하는 이유’와 연결된다. 하트는 공통적인 것의 운영에 자생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네그리 역시 코뮤니즘이란 물질적.존재론적으로 구축되어야 할 무엇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토스카노가 말한 “자본에 의해 부과된 공통성이나 집단성의 형태로부터, 해방의 잠재력을 가진 공통성과 집단성을 뽑아내는 것”(151쪽)과 다르지 않다. 


다른 한편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노동보다는 신용이, 자본과 노동의 적대보다는 채권자와 채무자의 협력적 적대가 더 적절하다고 주장하며 기존의 프롤레타리아트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중간층에 주목한다. 슬로터다이크의 주장은 일견 맑스의 핵심 개념과 동떨어진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착취/수탈 메커니즘에서 지대가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해보면, 그리고 이렇게 메커니즘이 달라졌음에도 협소하고 경직된 노동.노동계급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이런 주장 역시 코뮤니즘을 모색함에 있어 시사해주는 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니나 파워는 네그리와 하트의 다중 개념을 “노동자와 비노동자, 즉 체제에 포함된 사람들과 배제된 사람들 모두를”(120쪽) 포괄하는 흥미로운 시도라고 평가하는데, 슬로터다이크가 말하는 중간층을 바로 이 ‘체제에 포함된 사람들’로 볼 수 있다. 이른바 국민경제의 부속품으로 전락해 국가로부터 수탈당하고 있는 사람들 말이다(실제로 슬로터다이크는 중간층을 다중에 포함시키고 그에 대한 명확한 상을 제시하는 것이 신맑스주의자들의 과제라고 말한다).

 

끝으로 자크 랑시에르는 ‘몫 없는 자들의 몫’을 통해 코뮤니즘을 설명한다. 랑시에르의 설명에 따르면, ‘몫 없는 자’는 “몫이 없으나 사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개입할 수 있고, 생산을 조직할 능력을 입증할 수도 있는 행위자”(203쪽)이며 이들의 등장은 해방과 직결된다. 랑시에르는 혁명이란 맑스의 프롤레타리아트 개념과 같은 “전적으로 무無로 전락한 계급”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몫 없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몫을 가질 능력”으로부터 발생한다고 말한다(같은 쪽). 그리고 오늘날에도 착취는 도처에서 행해지지만, 착취 방식이 다양해졌기 때문에 착취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단일한 계급이 산출되는 일은 더 이상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피착취계급을 착취의 산물로, 평등을 불평등의 산물로 설정했던 그간의 논리를 역전시킨다. 


이처럼 이 책 맑스 재장전에서 코뮤니즘은 여러 정치철학자들의 입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그 다양한 접근과 변주를 하나로 꿰어주는 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실은 두 가지 색을 띠고 있다. 


하나는 주체의 욕망이 발휘되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는 태도이다. 하트는 자본주의에 순응하는 삶이 문제적인 것은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욕망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혁명의 효소는 “무엇이 옳으냐, 무엇이 진리이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가 원하는 사회를 만들어내는 데” 있는 것이다(60쪽). 네그리 역시 과잉생산의 본질은 욕구를 가진 사람들에게 구매할 돈이 없다는 사태에 있음을 지적하면서, “부나 재화의 균형, 순환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85쪽) 때문에 사람들의 욕망이 좌절되는 것을 문제 삼는다. 파워는 “더 단순하지만 더 창조적인 삶을 살려는 욕구나 욕망,” 즉 “상품물신주의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진정한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125쪽) 노력이 실재한다고 말 하며, 이런 욕망의 추구나 좌절이 고립된 개인의 차원에서 해소되는 것을 경계한다. 토스카노 역시 “집단적 욕구와 집단적 결정의 형태로 경제와 사회를 재조직하는 맥락”(150쪽)을 강조하며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전지구적인 협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한다. 


다른 하나는 혁명을 폭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느릿한 협력과 구성의 과정으로 보는 태도이다. 이에 관련해 하트는 “협력의 습관”이야 말로 곧 “공통적인 것을 운영하는 회로들”(55쪽)이라고 말하며, 네그리는 “현실의 변형과 현실을 만들고 구축하려는 의지 혹은 결정 사이의 관계 속에서 구성되는 무엇”(71쪽)이 코뮤니즘이라고 말한다. 지젝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가 공통재를 다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슬로터다이크는 코-이뮤니즘을 “치명적인 것에 맞선 동맹”으로, 코-이뮤니티(공동면역체)를 “자원 분배나 연대 협정을 토대로 구축”(173쪽)되는 것으로 제시함으로써 협력과 구성의 차원을 언급한다. 파워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를 조직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조직하고, 시위하고, 이론을 공부하고,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등의 더디고 때로는 지루한 과정”(133쪽)이라고 말하면서 혁명을 일회적인 각성이나 사건으로 여기기를 거부한다. 토스카노의 말처럼 “‘단박에 빠져나올 수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매력적일지는 몰라도 관념적”(156쪽)인 것이다. 


이렇게 주체의 욕망을 키우고 그것을 발휘하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게 되면, 그리고 그 과정을 협력과 구성의 과정으로 사유하게 되면, 코뮤니즘 사회는 어느 순간에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것이 된다. 이로써 이 책 맑스 재장전은 전지구적 위기의 시대에 혁명은 없고 파국만 있으리라는 냉소뿐만 아니라 혁명이 일거에 모든 것을 바꿔놓으리라는 판타지를 동시에 논파한다. 바라건대 이 책이 자본주의와는 다른 삶을 스스로 구축하고자 하는 이들, 코뮤니즘 이론과 실천의 접목을 모색하는 이들이 함께 모여 고민하고 토론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이런 접속이 시작되는 순간 우리의 삶은 상당히 달라져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번역 작업은 (글로 되어 있긴 했지만) 여러 정치철학자들의 생생한 육성을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재미있는 작업이 었다. 그리고 코뮤니즘을 연구하고 모색하는 사람으로서 대담자들이 보여준 문제의식, 관점, 태도로부터 많은 단초들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책의 원문은 영어와 프랑스어로 되어 있다. 영어로 된 원문(하트, 지젝, 파워, 토스카노, 슬로터다이크, 그레이와의 대담)은 은혜가, 프랑스어로 된 원문(네그리, 랑시에르와의 대담)은 정남영이 옮겼으며, 모든 장을 함께 검토했다. 


작업을 마무리하며 도움을 주신 분들께 짧게나마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먼저 도서출판 난장의 이재원 편집장님께 감사드린다. 옮긴이들이 미처 손보지 못한 부분들을 잡아주시고 독자들이 매끄럽게 읽을 수 있도록 문장들을 세심하게 다듬어주셨다. 이런 노력 덕분에 독자들은 이 책에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번역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연구공간 L에 고마움을 전한다. 연구공간 L의 친구들은 누구보다도 코뮤니즘에 대해 진지하게 모색하는 연구활동가들로서 이 작업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줬으며, 이 책의 잠재적인 열혈 독자들이기도 하다. 이 책을 놓고 그 친구들과 벌이게 될 토론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끝으로 이 땅 곳곳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자본주의와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다른’ 삶에 대한 이들의 욕망이 없다면 결코 혁명도 코뮤니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2013년 8월 26일 

서울 후암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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