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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코뮤니즘이 돌아왔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특이화 치료라고 불러야 한다. ㅡ <아우또노마 M 3호> 본문

쟁이다

[번역] 코뮤니즘이 돌아왔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특이화 치료라고 불러야 한다. ㅡ <아우또노마 M 3호>

은혜 Graco 2016. 4. 3. 20:34




코뮤니즘이 돌아왔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특이화 치료라고 불러야 한다.




비포 bifo | 은혜 옮김



1. 우리가 가진 지식으로 감당할 수 없다


경제학자들과 정치가들은 걱정한다. 그들은 그것을 위기라고 부른다. 그리고 지난 세기에 ‘경제’를 습격하고서 더 강한 ‘자본주의’를 남겨두고 사라진 이전의 엄청난 위기처럼, 그것이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 나는 이번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위기가 아니라 생산력(전지구적 네트워크에서의 인지노동)의 힘(potency)과 성장패러다임이 양립불가능하다는 징후이다. 이것은 위기가 아니라 500년간 지속된 씨스템의 마지막 붕괴이다. 다음과 같은 풍경을 보라. 세계의 거대권력들은 금융기관들을 구제하려고 한다. 그러나 금융의 붕괴는 산업씨스템에 영향을 주었다. 수요는 떨어지고 있고, 수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고 있다. 국가는 은행들을 구제하기 위해 미래의 납세자들에게서 돈을 걷고 있는데, 이는 수요가 갈수록 더 떨어질 것임을 의미한다. 가계소비는 급감하고 있으며, 그 결과로 많은 산업생산이 퇴출될 것이다. 이것은 그저 한 두 해 지속될 일이 아니다. 이번 경우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지에 실린 기사에서 중도보수인 데이빗 브룩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우리의 경제적 지식이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점을 우려한다.” 이것, 즉 전지구적 경제의 복잡성이 어떠한 지식과 협치도 훨씬 넘어서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2009년 2월 10일 미국 재무부장관 티모씨 가이트너는 오바마의 구제계획을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이 포괄적인 전략은 돈이 들고 위험을 수반하며 시간이 걸립니다. 우리는 그것을 변화된 조건에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제껏 시도해 본 적 없는 일들을 시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더 악화되는 시기, 그리고 그 과정이 순탄치 않거나 저지당하는 시기를 거칠 것입니다.” 이 말이 가이트너의 지적인 정직함을, 그리고 부시 일파와 비교되는 미국의 새로운 지도층이라는 인상적인 변별점을 보여준다 하더라도, 그들 역시 정치적 자신감의 붕괴를 지적한다. 우리가 ‘근대 합리주의’ 철학으로부터 물려받은 정치적 지식은 이제 소용이 없다. 카오스(즉 인간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복잡성의 정도)는 세계의 새로운 왕이다. 오늘날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은 ‘경제적’ 합리화나 적응이라는 방식으로 해결될 수 없다. 자본주의적 패러다임은 더 이상 인간활동의 보편적 규칙일 수 없다. 이것을 직시하자. 근대 자본주의의 역사는 끝났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2. 네트 vs. 범죄


‘신자유주의적’ 경제, 즉 가장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법칙에 기반을 둔 경제의 발흥과 쇠퇴를 되돌아보자. 지난 30년의 탈근대 경제에는 두 얼굴이 있다. 하나는 ‘네트경제(Net-Economy)’라고 이름 붙여질 수 있는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범죄적 자본주의(Criminal capitalism)’라는 얼굴이다. 네트경제는 협력과 공유에, 사회적 활동을 관리하는 새로운 방식의 창조에 기초한다. 네트경제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한 소유라는 원리에 도전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소유라는 원칙을 재평가하고 재부과하기 위해 범죄적인 방식으로 대응했다. 자본주의의 범죄적 얼굴은 이윤추구와 경쟁의 신성화를 위해 모든 법치를 폐기하는 것에 기초한다. 범죄적 정치는 전지구적 경제를 현재와 같은 엉망진창인 상태로 만들었는데, 범죄자들은 규제완화에 의해 초래된 카오스적 실재를 통치하는 데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각국에서 정권을 잡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는 실패했지만,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기만의 그림자 속에서 번성한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틀어쥐고서 마지막 대결을 준비한다.

일반지성과 범죄적 지배계급 사이에서 모순이 자라고 있다. 누가 이길 것인가?

미국에서의 오바마의 승리는 인류진화의 새 시대를 여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사건은 전세계적으로 일반지성이라는 평화적인 무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던져주었다. 새 대통령은 인지노동에 의해 득표했으며, 이 승리는 체니-부시로 표상되는 범죄계급의 패배이다. 그러나 이 승리는 싸움의 시작일 뿐이며, 그것은 무지·폭력·이윤이라는 잔혹한 힘(force)에 맞서는 지성적 힘의 싸움이 될 것이다.

모험적인 금융투기꾼들, 대기업 경영자들, 마피아 같은 룸펜부르지아지로 구성된 범죄계급은 두 가지 움직임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첫째, 모든 윤리적, 정치적, 혹은 법적 규칙에서 경쟁이 으뜸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선언을 통해. 둘째, 집단적 사고를 생산하는 씨스템, 즉 미디어 씨스템의 점유를 통해. 미디어 씨스템은 사회적 기대과 집단적 상상력을 가공하면서 생산적인 인지적 계급과 대비되었고 결국 그 계급을 압도했다. 그리고 착취자들의 사악한 꿈에 피착취자들을 예속시켰다.

소통의 사회적 공간(광고, TV)에 대한 사적 점유는 소외된 동일시와 삶·욕구·소비의 사유화라는 효과를 낳았다. 욕구는 자연스러운 충동이 아니라, 기업 미디어-씨스템에 의해 독점된 사회적 상상력과 감수성을 본뜨는 문화적 행동의 산물이다. 삶의 사유화는 사회적 연대를 분쇄했고, 각 사람에게 자신의 필요에 대해 고립 속에서 사고하도록 강요했다. 공공영역에 대한 왜곡인 이동성의 사유화를 예로 들어보자. 비합리적이고 공해를 일으키는 성가신 물건인 자가용(무게가 고작 80킬로그램인 신체를 이동시키는 데 드는 3톤의 철)은 20세기 내내 산업생산의 중심제품이었다.

왜 자동차는 사적이어야 하는가? 자동차는 모든 사람이 필요한 시간동안 타고 사용할 수 있는, 거리에 잠그지 않은 채로 두어서 모든 사람의 교통수단이 될 준비가 되어있는 공적인 제품이 될 수 있다. 자동차는 훨씬 더 편안한 공공 교통씨스템으로 대체될 수 있다. 지난 몇 십년간 공공 교통씨스템은 왜 지배계급에 의해 방해받아 왔는가? 우리는 그 이유를 아주 잘 알고 있다. 자본주의적 경제는 모든 다른 영역에서처럼 교통운송영역에서도 부족(不足)을 창출한다. 부족의 창출은 축적의 전제이며, 그것은 욕구의 사유화를 통해 가능하게 된다.

90년대 내내 네트워크된 생산의 부상과 자유주의적 싸이버문화는 금융자본주의와 인지노동 간의 동맹의 길을 열었다. 닷컴(dotcom)이라는 기치 아래, 젊은 지식인들과 과학자들이 자기 회사를 차릴 돈을 발견할 수 있었고, 수익 재분배 과정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범죄계급이 테크놀로지라는 새로운 힘(potency)을 장악하여 그것을 전쟁의 힘(power)에 종속시켰을 때 이 동맹은 깨졌다. 닷컴의 경험은 신자유주의적 미끼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세기가 바뀐 후 처음 십년간, 지적 노동은 불안정해졌고 어떤 경제적 협박이라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범죄계급은 인지노동을 노예로 만들었다. 지식은 단편화되었고, 수익은 감소했으며, 착취와 스트레스는 계속 늘어났다.

닷컴의 몰락과 9.11은 테크놀로지와 지식의 힘을 악용하고 수많은 희생자들을 낳으면서, 그리고 전세계에 증오를 폭발시키면서, 하이테크놀로지 경험의 종속을 나타냈다. ‘공포’의 대량생산, 광신, 무지는 서구인들이 전쟁에 동의하기에 충분치 않았다. 부시대통령은 서방시민들로 하여금 떠나서 쇼핑을 하게 만들었다. 테러 대 쇼핑, 침울한 심리상태 대 쇼핑. 그러나 이러한 대대적인 소비는 방대한 ‘빚’을 통해 이루어졌다. 유럽인들과 미국인들은 쓸모없는 것들을 많이 사도록 체계적으로 강요당했고, 정신적으로는 광고에 홀렸다. 그리고 행복을 소비와, 웰빙을 재산의 양과 동일시하도록 강요당했다.

획득으로 환원된 웰빙과 욕구의 사유화가 이 존엄과 자기애에 대한 어떠한 감각도 파괴했다. 사회적 주목시간은 정보노동과 광고의 흐름에 의해 점령당했다. 노동이 언어를 흡수했고 언어에는 정동이 실리지 않게 되었다. 사랑, 다정함, 쎅스, 애정, 타인에 대한 돌봄은 상품으로 바뀌었다. 모든 사람은 수많은 신용카드와 쇼핑기계의 주인이 되었고, 점점 불어나는 빚을 갚기 위해 더욱 더 일해야만 했다. 빚은 보편적인 사슬이 되었고 보편적인 붕괴의 완벽한 조건을 창출했다. 마침내 붕괴가 일어났다.

성장은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지난 30년간 축적된 ‘빚’을 사람들이 결코 갚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물리적 자원들이 거의 소진되었고 사회적 두뇌의 신경을 이루는 자원들이 거의 파손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3. 윤리적 저항과 전쟁


지구화와 사유화 과정이 비판을 압도하면서 진행되었고 그 파괴적인 잠재력이 ‘신자유주의적’ 스승들의 말씀에 잘 숨겨져 있던 90년대 말에, 윤리적 저항운동이 인지노동자의 대열로부터, 그리고 규제완화의 위험을 의식하게 된 노동자들의 대열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자본주의적 세기말에, 서방에서도 가장 서쪽에 있는 씨애틀에서 수십만 명이 모여 WTO회담을 저지하고 전지구적 착취효과에 항의하기 위해 행진했다.

그것은 ‘윤리적 시위의 시대’의 서막이었다. 씨애틀에서 제노바, 프라하에서 볼로냐, 그리고 칸쿤까지, 불안정노동자이자 인지노동자인 군중들은 함께 행진했다. 그들은 세계의 ‘윤리의식’이었는데, 물론 그들은 범죄계급의 교사 아래 경찰의 공격에 맞닥뜨렸다. 어떤 이는 죽임을 당했고, 많은 이들이 진실을 말한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그들은 지구인들에게 거대한 위기가 다가왔음을 경고하려 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이 옳았다는 것을 안다. 반지구화(No-global) 시위자들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파국에 대해 경고했다. 그리고 이제 파국이 도래했다.

파국은 그리스어로 관찰자들이 예전에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위치의 변화를 의미한다. 파국은 가시성의 새로운 공간들을, 따라서 가능성의 새로운 공간들을 열어젖힌다. 그러나 그것은 패러다임의 변화를 요구하기도 한다. 윤리적 시위자들은 2003년 2월 15일 전쟁에 대항하는 전세계적 행진 이후 패배했다. 그날 수억 명이 이라크전쟁에 대항하여 행진했다. 부시대통령은 사람들의 충고가 필요하지 않다고 답하고는 전쟁을 시작했다.

무지의 범죄계급이 ‘일반지성’의 운동에 맞서 이겼다. 그것이 지금 세계가 무너지고 있는 이유이다.

그 후 폭력이 폭력에 맞섰고 광신이 광신과 싸웠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라크, 파키스탄에서 이란, 그리고 조지아까지 미국 권력은 모든 곳에서 패배했고 고립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금융 붕괴는 지정학적 패배와 무관하지 않다. 윤리적 시위 기간이 끝나가는 동안 봉기의 새로운 순환이 서구 어딘가에서 폭발하기 시작했다. 경기후퇴가 사회적 삶을 파괴하는 동안, 2005년 11월 빠리 방리우에서의 폭동, 2006년 와하까에서의 교사들의 봉기, 2008년 12월 그리스 전역에서 일어났던 반란의 폭발은 앞으로 세계의 여러 부분을 습격할 반란적 물결의 조짐이었다.

산발적인 반란들이 앞으로 일어나겠지만, 우리는 그것에 많은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 반란들은 대도시 공간의 군사화로 인해 권력의 진정한 중심에 닿을 수 없을 것이고, 물질적 부나 정치권력에 있어 많은 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도덕적인 반지구화 시위의 기나긴 물결이 ‘신자유주의적’ 권력을 파괴하지 못했던 것처럼, 이 반란들 역시 새로운 의식과 새로운 감성을 드러내고 확산시키지 않고서는 해법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 해법은 일상생활을 바꾸는, 그리고 전지구적 네트워크라는 의식과 문화에 뿌리를 둔 일시적이지
않은 자율지대를 만드는 것이다.

완전고용은 끝났다. 세계는 그렇게 많은 노동과 착취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노동시간의 근본적인 감소가 필요하다. 삶의 권리로서 고용으로부터 독립되고 노동시간의 양도와 무관한 기본소득이 확정되어야 한다. 능력, 지식, 숙련은 교환가치라는 경제적 맥락에서 분리되어야 하며, 자유로운 사회적 활동으로 새롭게 사고되어야 한다.



4. 도덕적 채무 갚기


최근의 경기후퇴를 경제적 관점으로 봐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것을 세계자원과 세계권력의 분배를 바꿀 인류학적 전환점으로 봐야한다. 유럽은 식민주의 500년의 종말과 동시에 그 경제적 특권을 잃어버릴 운명에 있다. 서구인들이 축적한 ‘빚’은 경제적일 뿐 아니라 도덕적인 것이다. 이제 억압, 폭력, 인종청소라는 빚이 청산되어야 하는데 그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유럽인’의 대부분은 경기후퇴가 부과할 부의 재분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이주의 물결에 습격당한 유럽은 점증하는 인종주의적 위협에 직면할 것이다. 윤리적 전쟁은 피하기 힘들어 질 것이다. 미국에서의 버락 오바마의 승리는 근대 자본주의 씨스템의 전제였던 서구지배의 종식의 서막을 알렸다. 정체성주의적이지 않은 토착적 ‘르네쌍스’의 물결이 특히 라틴아메리카에서 일고 있다.

노동과 자본 간의 투쟁은 예상치 못한 성과를 얻을지 모를 새로운 국면에 도달했다. 새로운 미 행정부가 정말로 무엇을 할지 우리는 말할 수 없다. 내가 앞서 언급한 가이트너의 말은 오바마 행정부가 시행착오를 통해 방법을 찾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포스트파르티잔 실용주의(post-partisan pragmatism)라는 개념의 의미이다. 20세기에 통했던 낡은 이데올로기적 해법은 이제 유효하지 않다. 오늘날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는 현실에 맞지 않다. 지배계급과 경제학자들은 경기후퇴에 맞서기 위해 낡은 방법들을 제안하고 있다. 새로운 땅에 낡은 지도를 사용하는 격이다. 모두가 “보호주의는 피해야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각 나라들은 국가경제를 보호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늘 그렇듯이 국가가 은행을 구제해야한다고, 부채를 갚고 신용을 복구해야한다고, 그 다음에 기업주들이 기업을 경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편 사회주의자들은 국가가 은행을 인수하고 공장을 국유화해야한다고 말한다. 국유화된 공장들이 똑같은 물건을 계속 생산한다면 대체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공적 소유냐 사적 소유냐의 양자택일은 거짓된 것이다. 해법은 더 이상 ‘경제’의 왕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의 왕국에 있다. ‘성장’모델이 깊이 내면화되어왔다. 그것은 매일의 삶에, 지각(知覺)에, 욕구에, 그리고 소비스타일에 침투한다. 문화적 행동은 이 모델로부터 사회를 해방시켜야 한다.



5. 지양 없는 코뮤니즘


기본적 욕구(주거, 교통, 식량)와 사회적 써비스의 사유화는 부와 웰빙을 소유한 재산의 양과 문화적으로 동일시하는 데 기초한다. 근대 자본주의의 인류학에서 웰빙은 즐거움이 아니라 획득과 등치되어왔다. 재산과 웰빙의 동일시는 우리가 앞으로 겪을 사회적 불안의 과정 속에서 문제시되어야 한다. 이것은 정치적 임무이기 전에 문화적 임무이며 정신적 치료 상의(psychotherapeutic) 임무이기도 하다.

사유재산 제도의 이론적 정당화(가령 존 로크의 저작)는, 공유될 수 없는 것이 주는 배타적 즐거움을 확실히 할 필요성에 기초한다. 사과는 나눌 수 없다. 만약 내가 사과를 먹으면 당신은 사과를 먹을 수 없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에서 재화의 상태는 변했다. 그것은 비물질적 재화, 즉 사용해도 소모되지 않는 기호적 물건이다. 재화가 기호적 생산물이 될 때 사유재산은 부적절해지며, 사유재산을 강제하기가 실상 더욱더 어려워진다. 불법복제에 반대하는 캠페인은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진짜 해적은, 필사적으로 집단지성의 산물을 사유화하려고 하는, 그리고 생산자들의 커뮤니티에 억지로 세금을 부과하려고 하는 기업들이기 때문이다. 집단지성의 산물은 내재적으로 공통적이다. 지식은 단편화될 수도, 사적으로 소유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와 금융시장의 붕괴가 하이퍼자본주의의 기초가 갖는 취약성을 드러낼 때, 코뮤니즘의 새로운 유형은 이미 ‘디지털 네트워크’라는 테크놀로지적 변형으로부터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성장’과 ‘부채’가 그리고 웰빙으로서의 사적 소비가 최근에 붕괴한 것에서, 변형의 새로운 물결을 예측할 수 있다. 지식의 공통성, 사적 소유의 이데올로기적 위기, ‘욕구’의 절실하게 필요한 공통화―이 세 가지 힘 때문에 새로운 지평이 보이게 되고 새로운 풍경이 드러날 것이다. 코뮤니즘이 돌아오는 것이다.

전위의 주의주의와 의지에, 그리고 ‘새로운 전체성(New Totality)’에 대한 편집증적 기대에 기초한 ‘코뮤니즘’의 낡은 얼굴은 20세기 말에 패배했으며 결코 부활할 수 없을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코뮤니즘이 필연성의 형태로, 자본주의 씨스템의 급격한 붕괴의 불가피한 성과로 드러날 것이다. 자본의 코뮤니즘은 야만적인 필연성이다. 우리는 이 필연성에 자유를 집어넣어야 한다. 우리는 이 필연성을 조직된 의식적 선택으로 만들어야 한다.

코뮤니즘이 돌아왔지만 우리는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불러야 한다. 역사적 기억이 ‘종교’의 정치적 전횡과 이 특정형태의 사회적 조직을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역사적 코뮤니즘은 ‘전체성’이 ‘특이성’보다 우선한다는 생각에 기초했다. 그러나 20세기의 ‘코뮤니즘’ 운동을 정의한 변증법적인 틀은 완전히 버려졌고, 결코 아무도 그것을 부활시킬 수 없을 것이다.

‘역사주의’라고 이름 붙여진 종류의 종교적 신념의 형성에서 헤겔의 패권은 주요한 역할을 했다. ‘지양’(이념의 실현을 위한 실재적인 것의 폐기)은 코뮤니즘의 총체적 개념화의 편집증적 배경이다. 그러한 변증법적 틀 안에서 ‘코뮤니즘’은 모든 것을 둘러싸고 있는 전체성으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둘러싸고 있는 자본주의적 전체성을 폐기하고 난 후 나타날 것으로 기대되었다. 주체(노동계급의 의지와 행동)는 낡은 것의 폐기와 ‘새로운 것’의 복구를 위한 도구로 간주되었다.



6. 특이성들


산업노동계급은 개념들의 생산의 외부에 있기에 오직 ‘전체화와 폐기’라는 신화와 동일시될 수 있지만, 일반지성은 그
렇게 할 수 없다. 일반지성은 이기 팝(Iggy Pop)의 물고기와 같다. “물고기에게는 목소리가 없고, 표현이 없다. 왜냐하면 물고기는 알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일반지성은 20세기에 있었던 레닌주의적 당과 같은 표현적 주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일반지성’의 정치적 표현은 기호를 알고 창조하고 생산하는 행동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특이성들의 다층적이고 공통적인 진화와 특이화의 ‘동학’이라는 복수(複數)의 장을 위해 ‘변증법’의 장을 버렸다. 자본주의는 끝났지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일시적이지 않은 자율지대’의 창조는 어떠한 전체화도 생겨나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혁명’이라는 카타르시스적 사건을 목격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국가권력’의 갑작스런 붕괴를 보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 수개월, 수년 동안 우리는 일종의 ‘주체 없는 혁명’을 목격할 것이다. 이 혁명을 주체화하기 위해 우리는 특이성들을 증식시켜야한다. 내 소박한 생각에는 이것이 우리의 문화적, 정치적 임무이다.

‘폐기와 전체화라는 변증법’의 장을 떠난 후, 이제 우리는 재조합과 특이화―펠릭스 가따리의 저작, 특히 그의 후기 저작인 
카오스모제에서 분명하게 다루어진 개념―의 동학에 대한 이론을 구축하려 한다. 특이성은 ‘개체’(individual)를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집단적인 특이성들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이성이라는 단어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순응과 반복의 어떠한 규칙도 따르지 않는, 그리고 어떠한 역사적 필연성에도 갇히지 않는 동인(動因)이다. 특이성은 필연적인 과정이 아니다. 논리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역사의 결과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7. 끝없는 과정


우리는 사회적 풍경의 빠른 변화보다는 새로운 경향들의 느린 출현을 기대해야 한다. 무너져가는 지배적 경제의 장을 떠나는 커뮤니티들, 구직을 포기하고 자신들만의 써비스 네트워크를 창조하는 더 많은 개인들이 바로 그 경향을 이룬다.

산업의 해체는 사회적 삶이 더 이상 산업노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멈출 수 없다. ‘성장’이라는 신화는 버림받을 것이며, 사람들은 부를 분배하는 새로운 양식을 모색할 것이다. 특이한 커뮤니티들은 바로 부와 웰빙에 대한 인식(perception)을 간소함과 자유라는 의미에서 변형시킬 것이다. 이러한 이행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문화적 혁명은 부에 대한 인식을 바꾼다. 우리는 이 혁명의 과정에서, 획득에 필요한 돈을 구하느라 너무 바쁘기 때문에 누릴 수 없는 그런 점증하는 재화를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을 부로 인식하는 데서 벗어나, 양이 얼마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정말로 중요한 것들을 누리는 것이다.

재화와 써비스의 탈사유화는 이러한 절실한 문화적 혁명을 통해 가능해질 것이다. 이것은 계획되고 단일화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특이한 개인들과 커뮤니티들의 [사유화로부터의] 이탈이 갖는 효과일 것이며, 문화·기쁨·정동을 위한 시간의 해방과 공통적인 재화·써비스를 함께 이용하는 경제의 창조가 갖는 결과일 것이다. 이 과정이 사회의 주변부까지 확대되는 동안, 범죄계급은 자신의 권력을 계속 붙들고 있을 것이며 더욱더 억압적인 법제화를 집행할 것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점점 더 공격적이고 절박하게 될 것이다. 윤리적 내전은 바로 시민의 삶의 짜임새(fabric)를 파괴하면서 전 유럽으로 확대될 것이다.

특이성들의 증식(이탈과 일시적이지 않은 자율지대의 구축)은 평화적인 과정일 것이다. 그러나 순응적인 다수는 폭력적으로 대응할 것이며, 이것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 순응적인 다수는 지적인 에너지가 달아나버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지적인 활동의 표현을 공격하고 있다. 이 상황은 ‘미디어-전체주의’에 의해 생산된 ‘대중 무지’와 공유된 ‘일반지성’ 사이의 싸움으로 묘사될 수 있다.

우리는 이 과정의 성과가 무엇일지 예측할 수 없다. 우리의 임무는 자율의 장을 확장시키고 지키는 것, 그리고 가능한 한 공격적인 ‘대중 무지’의 장과 어떠한 폭력적 접촉도 피하는 것이다. 대립적이지 않은 이러한 이탈 전략이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것이다. 때로는 인종주의와 파시즘에 의해 대립이 불가피해질 것이다. 원치 않는 갈등일 경우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예견할 수 없다. 비폭력적 대응은 분명 최선의 선택이지만, 그것이 언제나 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적 소유와 웰빙의 동일시는 뿌리가 매우 깊어서 인간 환경의 야만화(barbarization)가 완전히 배제될 수도 없다. 그러나 일반지성의 임무는 정확히 다음과 같다. 편집증으로부터 벗어나기, 인류의 저항의 공간을 창조하기, 하이테크-로우에너지(high-tech-low-energy) 생산에 기초한 생산의 자율적 형태를 실험하기. 다른 한편으로는 범죄계급 및 순응적인 사람들과의 대립을 피하기.

정치와 치료는 앞으로 하나의 동일한 활동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절망과 우울과 공황상태를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성장이데올로기가 폐기된 이후의 경제(post-growth economy)를 감당할 수 없고, 용해되고 있는 근대적 정체성을 그리워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화적 임무는 그들에게 주목하며 그들의 광기를 돌보고 그들에게 행복한 적응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의 임무는, 치료를 위한 전염공간의 역할을 할, 인류의 저항의 사회적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 될 것이다. 자율적이게 되는 과정은 ‘지양’이 아니라 ‘치료’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전체화하지도 않고 과거를 파괴하거나 폐기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끝없는 과정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2009년 2월, 런던



* [역주] 에밀 쿠스투리차의 영화 <아리조나 드림> OST 삽입곡 This is a film의 가사.


This is a film about a man and a fish.

This is a film about dramatic relationship between a man and a fish.

The man stands between life and death.

The man thinks,

The horse thinks,

The sheep thinks,

The cow thinks,

The dog thinks.

The fish doesn't think.

The fish is mute.

Expressionless.

The fish doesn't think,

Because the fish knows

Everything.


The fish knows

Everything.
 

 

자율평론』 29호, 『아우또노마 M』3호 (2009년 가을)

원문보기  www.generation-online.org/p/fp_bifo6.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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