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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크랙 캐피털리즘』ㅡ 자본주의를 찢고 다른 세계를 창조하라 본문

쟁이다

[서평] 『크랙 캐피털리즘』ㅡ 자본주의를 찢고 다른 세계를 창조하라

은혜 Graco 2016. 4. 3. 21:04



자본주의를 찢고 다른 세계를 창조하라



신생 2013년 가을호



  권력에 맞서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했던 역사 속의 움직임들은 늘 권력 장악이라는 선결과제에 맞추어 진행되어왔다. 그러나 이 선결과제는 최종목적지로 둔갑해버리기 일쑤였다.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통해 권력을 일소하는 강경한 노선이든 선거라는 절차를 밟아 정권을 잡는 온건한 노선이든, 권력 장악은 항상 세계 변혁이 아니라 권력의 유지로 이어졌다. 그 와중에 역사상 세계 변혁을 목표로 내건 가장 광대한 실험이었던 사회주의가 생산력주의와 권위주의로 왜곡되었고, 이는 권력 장악 및 유지에 대한 반발과 함께 ‘권력 장악과 무관한’ 혹은 더 나아가 ‘권력 장악에 맞서는’ 세계 변혁에 대한 모색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반발과 모색은 권력 장악 없는 세계 변혁의 첫걸음이었던 68혁명, 신자유주의에 대한 최초의 명시적 선전포고라고 할 수 있는 90년대 중반의 사빠띠스따 봉기, 2000년대 초반의 대항지구화운동과 반전행동, 200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금융위기에 대항하는 시위(‘99%’의 운동) 등을 봉우리로 하는 큰 산맥을 이루고 있다.  


  “권력 장악 없이 세계를 변혁하라!” 존 홀러웨이의 『크랙 캐피털리즘』은 이 구호의 연장선상에 있는 책이다.[각주:1] 『크랙 캐피털리즘』은 투쟁 동학의 이러한 일대 전환을 배경으로 하여, 2000년 하고도 1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 시대에 유용한 투쟁 이미지 혹은 투쟁관을 제시하고 있다. 제목에서 이미 드러나듯이 그것은 바로 균열(크랙, crack)이다. 권력 장악을 ‘통한’ 세계 변혁 운동의 이미지는 부수고(탈권, 脫勸) 세우는(입권, 立勸) 것이다. 권력 장악 ‘없는’ 세계 변혁 운동의 이미지 역시 부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그 부수기는 그 자리에 또 다른 권력을 세우기 위한 부수기가 아니라 전혀 다른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부수기이며, 권력 바깥에서 권력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 권력 안에서 권력을 찢고 나오는 부수기이다. 그래서 균열이 오늘날의 투쟁의 주된 이미지로 제시되는 것이다.

          

  그러나 균열은 단순히 하나의 이미지에 그치지 않는다. 균열, 더 정확히 말해 균열내기는 투쟁의 방법으로서 기능한다. 균열은 “인간 행위의 역량을 부정하는 범주들을 열어서, 그것들이 부정하고 감금하는 행위를 그것들의 핵심에서 발견하는 것”이자 “자본주의를 지배로서가 아니라 그것의 위기, 그것의 모순, 그것의 취약함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다.(36쪽) 홀러웨이가 제시하는 이 ‘방법으로서의 균열’은 투쟁의 주도권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먼저 권력에 의해 부정되고 감금되어 있는 잠재력을 포착한다. 아직은 (혹은 앞으로도 계속) 비가시적일지라도 권력에 의해 가려지거나 짓눌려 있는 것일 뿐 그것이 엄연히 존재하며 발휘되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잠재력을 권력(자본주의)의 위기, 모순, 취약함을 가져오는 보다 근본적인 힘으로 정초한다. 이로써 투쟁은 권력만큼이나 견고한 무언가를 세워서 권력을 타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잠재력을 통해 권력에 균열을 내는 것이 된다. 


  이러한 관점의 역전은 투쟁의 주도권으로부터 배제되었던 ‘일상’과 ‘보통사람들’을 발굴하는 출발점이 된다. 이제 혁명은 특정한 사람들의 몫이 아니라 세계에 존재하며 세계의 구성에 어떤 식으로든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일로서, 더불어 바로 지금-여기에서 충분히 시작할 수 있으며 시작해야하는 일로서 재정의된다. 여기에는 전위(당)-대중 모델도, (그보다 느슨하고 유연하긴 하지만 역시 ‘지도’라는 관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활동가-대중 모델도 설 자리가 없다. 홀러웨이가 이 책을 통해 시도하고 있는 관점의 역전은 맑스의 대인적 비판에 기초하고 있다. 맑스가 말한 대인적 비판은 “모든 현상들을 인간 주체에게로, 인간 활동이 조직되는 방식에게로 가져가는 비판”(150쪽)이다. 홀러웨이에게 대인적 비판은 모든 형태의 외삽을 차단하고 내재성의 지평을 확보하는 근거가 된다. 모든 것을 창조하는 것은 외부에 있는 초월적인 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라는 외침, 심지어 우리를 파괴하고 억압하는 것조차도 우리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외침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투쟁에 대한 관점을 역전시킨 홀러웨이는, 권력 장악을 ‘통해’ 자본에 대항하는 노동의 투쟁에서 권력 장악 ‘없이’ 자본에 대항하는 노동의 투쟁으로 이행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권력 장악과의 명백한 단절 속에서, 이제 적대의 선은 자본에 대항하는 노동의 투쟁에서 노동에 대항하는 행위의 투쟁으로 이동한다. 그가 이동시킨 이 적대의 선은 일찍이 맑스가 파악한 노동의 이중성에서 연원한다. 맑스가 『경철 수고』에서 밝힌 소외된 노동과 의식적 삶-활동의 대립, 그리고 『자본론』에서 밝힌 추상노동과 유용한 구체노동의 대립이 바로 그것이다. 홀러웨이는 이 이중성을 단순한 논리적 모순관계로 여기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그 자체로 하나의 실재적 투쟁임을, “살아있는 적대의 관계”(154쪽)임을 주장한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종언과 세계 변혁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노동과 노동 외부에 있는 것으로서의 자본 사이의 투쟁이 아니라, 노동 내부에서 노동의 이중성의 두 양상이 벌이는 투쟁이다. 이 지점에서 홀러웨이는 기존의 노동이라는 범주를 과감하게 해체한다. 그는 노동이라는 범주 속에서 억압당하면서도 끊임없는 반란으로서 존재했던 의식적 삶-활동과 유용한 구체노동을 거기에서 빼내어 ‘행위’라는 범주로 옮겨놓는 한편, 그 반란을 억압하는 것으로서 존재했던 소외된 노동과 추상노동은 계속 노동의 범주 속에 남겨둔다.[각주:2] 이러한 재범주화를 통해 “노동의 창출과 자본의 창출은 동일한 과정”이 되며, “자본에 대한 투쟁은 그것을 생산하는 것에 대한 투쟁, 즉 노동에 대한 투쟁”이 된다.(163쪽) 


  홀러웨이는 추상노동이 정치경제학이라는 특정한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삶 전반―주체성‧섹슈얼리티‧자연환경‧정치‧시간성 등―에 걸쳐 행하고 있는 울타리치기를 조명한다. 홀러웨이에게 추상은 “사회관계의 특유하게 자본주의적인 엮어짜임, 즉 특수한 것의, 총체성으로의, 특유하게 자본주의적인 엮어짜임”(149쪽)이다. 그래서 추상노동을 수행하는 우리는, 즉 사회관계의 자본주의적 엮어짜임(사회적 종합) 속에서 노동하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억압하는 것을 창조하게 되는 것이다. 추상노동, 달리 말해 행위의 노동으로의 추상은 투쟁의 주체를 노동계급으로 인격화하며 섹슈얼리티를 상호배타적인 그러나 질적으로는 동일한 양성(남과 여)모델로 환원한다. 그리고 자본주의 이전에 인류가 가졌던 자연과의 공감적 관계를 단절시키며, 우리의 내재적인 행위할-수-있는-힘을 지배하는-권력으로 외부화함으로써 국가와 시민(개인)을 창출하고, 우리의 구체적 행위의 시간을 척도의 시간(시계시간)에 종속시킨다. 


  요컨대 행위의 노동으로의 추상이 수행하는 온갖 울타리치기는 우리의 구체적 행위를 짓밟으면서 총체성(종합)으로 나아가는 운동이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적대의 선을 노동(추상노동)과 행위 사이에 긋는 것이다. 홀러웨이는 바로 이 순간이, 우리의 노동이 자본의 생산에 다름 아닌 이 암울한 현실에서 빠져나오는 출구가 된다고 역설한다. ‘행위의 노동으로의 추상’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노동보다 앞서 존재하는 것은 행위이며 행위 없이는 노동으로의 추상이 일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추상노동에 균열을 낼 수 있는 것은 행위이다.


  홀러웨이는 이 균열로서의 행위를 ‘틈새혁명의 새로운 멜로디’라고 칭하며, 이것을 특수성‧주체성‧시간이라는 세 가지 맥락에서 고찰한다. 먼저 추상노동에 대항하는 행위는 총체성에 대항하는 특수성이다. “다양한 색깔을 갖는 차이들의 폭발”로서의 구체적 행위는 종합으로서의 결정을 구체적이고 특수한 자기결정으로 역전시키며, 이때 자기결정은 “일상활동의 조직이라는 맥락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298쪽) 따라서 그가 상상하는 조직화 또한 전위당이나 노동계급 같은 견고하고 동질적인 집단이 아니라 특수한 것들의 느슨한 연합이다. 


  다음으로 주체성의 측면에서, 추상노동에 대항하는 행위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그러나 ‘부재’와 ‘주변화’가 아닌 잠재성이다. 여기서 홀러웨이는 동질화된 배타적인 우리(we)가 아니라 열려있는 우리를 제시한다. 이러한 열려있음은 추상노동과 행위의 적대를 우리 내부의 적대로 옮겨놓는다. 우리의 주체성은 본디 선한 것이나 순수한 것이 아니라 분열적인 자기적대의 장이다. 다시 말해 추상노동자로서의 우리와 행위자로서의 우리가, 그리고 “자본주의적 관계의 재생산과, 거부하고-창조하려는 충동”(318쪽)이 끊임없이 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투쟁의 제도화는 경계해야할 것으로 파악된다. 홀러웨이에게 제도화는 “투쟁에 일정한 경로를 제공”(321쪽)하는 것으로서 동일성을 창출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끝으로 시간의 측면에서, 추상노동과 행위는 척도로서의 시간과 행위시간의 대결로 그려진다. 행위시간은 매순간이 결코 동질화될 수 없는 측정불가능한 시간으로서, 이는 두 가지 결을 갖고 있다. 때로는 시계시간에 균열을 내고 그것을 초과하는 강렬한 순간으로서, 때로는 “다른 세계를 참을성 있게 구축하는”(344쪽) 느린 과정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행위시간이 갖고 있는 이러한 두 가지 시간성은 대기주의와 진보주의 모두에 대항한다. 여기에는 혁명의 때를 기다려야할 필요도 쉼 없이 앞으로 나아가야한다는 강박도 없다. 시간의 측면에서도 제도화는 “우리 위로 기어올라 각각의 순간으로부터 열정을 빨아들이는 시계시간의 실천”(337쪽)일 뿐이다.


  홀러웨이는 행위의 불화하는 힘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의 제도화는 거부하는 태도를 보인다. 우리가 지금껏 살펴본―권력 장악에 대한 거부에서 추상노동 비판으로 전개되는―그의 사유에 따르면, 권력 장악과 추상노동은 총체성과 직결되기 때문에 거부하고 비판되어야한다. 마찬가지로 제도화도 (필시 ‘제도’라는 용어가 갖는 역사적 맥락 때문일 테지만) 그에게는 권력 장악이나 추상노동과 다를 바 없어질 수 있는 총체성을 향한 운동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제도화라고 부르건 조직화라고 부르건 간에 ‘만들기’ 혹은 ‘기획’을 투쟁의 적극적인 계기로 삼지 못하는 것은,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반자본주의 투쟁의 새로운 상(균열혁명, 틈새혁명)과 새로운 적대의 선(노동에 대항하는 행위)이 가진 힘을 더 펼치지 못하고 누그러뜨린다. 


  물론 홀러웨이도 “우리의 행위할-힘의 발전은 그것의 사회화와 밀접”하다는 사실과 “문제는, 자본주의 하에서 사회화가 추상으로 존재”한다는 데 있음을 인정하고 있으며, “우리의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활동의 특수성에 대한 즉 자기결정을 향한 경향에 대한 충분한 인식에 기초를 둔, 자본주의의 사회적 종합보다 훨씬 느슨하게 짜인 사회화를 구축하는 것”을 과제로 삼고 있다.(355~356쪽) 그리고 부록으로 실린 마이클 하트와 주고받은 편지에서도 ‘균열들의 합류’ 문제가 앞으로 연구되어야할 주제로 남아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총체성을 너무 경계한 나머지 행위의 공통적인 층위를 포기하게 되면―달리 말해 차이를 부정하고 제거하는 총체성에 차이를 긍정하고 연결시키는 공통성(commonality)을 대립시키지 못하고 특수성만을 대립시키는 데 그치게 되면―무한히 뻗어나갈 수 있는 (홀러웨이가 선호하는 표현을 사용하자면 무한히 전염되고 공명할 수 있는) 투쟁의 잠재력에 또 다른 한계를 부여하는 셈이 되고 만다.


  홀러웨이는 “자본주의를 만들기를 멈추고 그 대신 뭔가 다른 것을 하라”고, 그것이 바로 혁명이라고 말한다.(338쪽) 이것은 바꿔 말하면 추상노동을 멈추고 행위에 집중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추상노동을 멈추고 행위로 옮아가는 것 못지않게, 우리의 생산이 자본주의적으로 추상되지 않아도 되는 (가령 고용/임금관계에 종속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상상하고 기획하는 것 또한 중요한 과제이지 않을까? 우리의 행위할-힘이 잘 발휘될 수 있는 조건, 우리의 행위가 잘 유통되고 연결되어서 또 다른 행위를 낳는 생산적인 네트워크 등을 기획하는 것 역시 중요하지 않을까? 특수한 것들의 느슨한 연결이 총체성으로 귀결되는 것이 두려워서 그것이 어떤 조건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고민을 포기한다면, 결국 그 연결을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남겨놓는 것에 다름없지 않은가? 


  이처럼 『크랙 캐피털리즘』은 오늘날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을 모색하는 이들로 하여금 많은 의문을 던지게 만드는 책이다. 그러나 이 의문들은 곧 총체성을 거부하는 운동 속에 자리한 빈 칸, 우리의 실험들이 펼쳐지게 될 열린 공간이기도 하다. 이 책은 “새로운 투쟁의 새로운 언어를 배울 시간”(38쪽)이자, 이제껏 그리고 지금도 권력 장악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경향과 잠재력으로서의 행위를 묵살하는 경향을 비판하는 데 유용한 무기가 된다. 그 새로운 언어와 무기를 어떻게 벼리고 휘두를지를 창안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이 책을 경유하여 균열혁명의 멜로디를 흥얼거리는 데 동참하는 모든 사람들의 공동 작업이 될 것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올바른 해답도 없다. 단지 수많은 실험들만이 있을 뿐이다.”(366쪽)




  1. 이 구호는 홀러웨이가 10여 년 전에 낸 책의 제목(Change the World Without Taking Power)이기도 하다. 이 책의 한국어판은 다음과 같다. 존 홀러웨이,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조정환 옮김, 갈무리, 2002. [본문으로]
  2. 유용노동 또는 구체노동의 경우, 홀러웨이는 추상되기 이전의 그 행위적 성격에 주목한다. 맑스의 노동의 이중성(추상노동 대 유용한 구체노동)을 ‘추상노동 대 구체적 행위’로 재구성하는 것이 더 낫다고 언급하는 대목(154쪽)이 있긴 하지만, 유용노동과 유용한 행위, 구체노동과 구체적 행위를 특별한 구분 없이 혼용하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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