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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적인 것의 생산과 분배 : 예술가에 관한 몇 가지 물음들 - 마이클 하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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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적인 것의 생산과 분배 : 예술가에 관한 몇 가지 물음들 - 마이클 하트

은혜 Graco 2016. 4. 3. 22:17



공통적인 것의 생산과 분배 : 예술가에 관한 몇 가지 물음들

- 『오픈2009년 16호 “지구적 현상으로서의 아트 비엔날레”



마이틀 하트 | 은혜 옮김



미학과 정치의 관계는 대부분 양자의 상호작용의 측면에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양자의 상호개입의 측면―예술에서의 정치적 행동 또는 정치에서의 미적 실천―에서 생각된다. 이러한 관계는 큰 개념상의 어려움 없이 제시된다. 물론 그러한 교차점들이 적어도 플라톤 이후로 여러 진지한 실천적 관심사들과 관련하여, 예컨대 정치적인 것의 안정성이나 미적 실천의 무결성과 관련하여 제기되어왔지만 말이다. 자크 랑시에르는 미학과 정치의 관계를 개념상의 문제로 제시한다. 랑시에르의 주된 관심은 정치적 예술이나 미학이 된(aestheticized) 정치가 아니라, 이 두 개의 분리된 영역에서의 활동이 추상적인 수준에서 연동되어 공통적인 것의 분배(distribution) 또는 공유(sharing)를 작동시키는 방식에 있다. 여기에 공통적인 것의 생산이 오늘날의 삶정치적 질서에서 점점 더 중심적이 되어가고 있다는 인식을 더하게 되면, 랑시에르의 접근법은 훨씬 더 강력해진다. 이러한 개념들의 연결을 탐구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술가에 관한 몇 가지 도전적인 물음들을 던질 수 있게 해주며, 아마도 예술의 정치를 위한 새로운 길을 열어줄 것이다.  


랑시에르에게 미학과 정치의 연결은 특히 그가 ‘감각적인 것의 나눔’(le partage du sensible)이라 부르는 것에 있다. 그는 “공통적인 것의 존재 그리고 공통적인 것 안에서 각각의 몫과 위치를 정하는 한계설정,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드러내는 감각지각(sense perception)이라는 자명한 사실들의 체계를 나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라고 부른다”고 말한다.[각주:1] 랑시에르에게 공통적인 것(le commun)은, (아쉽게도 그의 저작의 영역본에서는 다소 모호하긴 하지만) 정치적인 것과 미적인 것에 대한 그의 생각에 초석이 되는 특수한 용어이다.[각주:2] 예술적 생산의 표준관행에 가까운 엄밀하고 형식주의적인 미학의 정의를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라는 측면에서 인식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예술적 실천은, 우리가 공유하는 바를 드러내는 동시에 감각적인 것의 영역에 있는 그 요소들을 분배 또는 분할하는 행동 및 구성 방식이다. 예컨대 시각예술의 경우, 예술적 실천은 우리가 공유하는 바를 시야에 드러나게 함(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과 동시에, 보이는 것들 사이의 분할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분할을 작동시킨다. 나눔(partage)의 두 가지 의미―공유와 분할―가 여기서 어떻게 동시에 작동하는지 주목하라.   


랑시에르의 정의가 정치에 어떻게 똑같이 적용되는지는 덜 명확할 수도 있다. 그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 누가 공통적인 것에 몫을 갖고 있는지를 드러내준다고 설명한다.[각주:3] 달리 말해, 정치에서 공유와 분할은 공동체의 공통적인 부‧재화‧자원‧지식은 물론 공동체의 직무와 권력을 가리킨다. 우리는 더 상투적인 방식으로 말할 수도 있다. 정치는 우리가 잠재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바(와 그것의 분배)에 대한 우리의 권리 또는 권한을 둘러싼 결정을 포함한다고 말이다. 랑시에르는 “우리가 이득과 손실의 균형을 깨고 공통적인 것이라는 몫을 분배하는 것에 관해, 그리고 공동체의 몫과 그 몫을 획득할 권한, 즉 공동체에 권리를 부여해주는 axiaï를 기하학적 비율에 따라 고르게 나누는 것에 관해 고민하는 바로 그때 정치는 시작된다”고 말한다.[각주:4] 랑시에르의 정치 개념은, 분할인 동시에 공유인 나눔의 작동을 통해 매개되는 ‘몫’과 ‘공통적인 것’의 관계에 있다. 당연히 공통적인 것은 동일성이나 무차별성의 영역이 아니다. 공통적인 것은 사회적‧정치적 차이들의 마주침, 때로는 동의로 특징지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적대로 특징지어지기도 하는, 때로는 정치체를 구성하기도 하고 때로는 정치체를 와해시키기도 하는 마주침이 일어나는 현장이다. 이로써 랑시에르는 정치와 미학의 즉각적인 연결이 아니라, 정치와 미학이 공통적인 것 위에서 함께 실행하는 연동작용을 입증한다.  



공통적인 것의 생산


랑시에르의 구상에 의해 제기된 몇 가지 물음들을 명확히 하기 전에, 잠시 공통적인 것의 생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겠다. 최근 상이한 분야에서 많은 이론가들이 사유화에 관한 경제 독트린들을 분석하고 그에 도전하고자 공통적인 것(영어로는 종종 ‘s’를 붙인 ‘the commons’)에 관한 생각들을 부활시켰다. 공통적인 것/공통재[원문은 ‘the commons’. 글의 흐름상 ‘the common’과 ‘the commons’를 하나의 계열로 묶어서 사용하므로 두 가지 번역어를 병기했다. - 옮긴이]라는 개념의 사용이 일반적으로 끌어오는 역사적 비유는 자본주의 시대의 여명기에 일어난 종획 과정이다. 처음에는 영국에서, 이후로는 유럽 전역에서 가축을 방목하고 땔나무를 모으는 데 이용되던 공유지와 공유림이 사적 소유로 변모하고 울타리로 둘러쳐진 것이다. 16~17세기 영국에서 공통적인 것을 방어한 사람들은, 종종 하느님이 인류에게 지구와 천혜를 공통적으로 사용해야할 것으로 내려주었다는 기독교적 논의에 입각했다. 그들은 자연은 결코 공통적이길 멈추어서는 안 되며 그 일부가 분배될 수는 있어도 항상 공유되는 상태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떤 맥락에서 오늘날 공통적인 것에 관한 담론들은, 물, 가스, 다이아몬드, 석유 같은 공통적인 자원 혹은 천연자원의 사유화 및 판매에 문제를 제기할 때 이전 시대의 상황들과 상당히 일치하는 [작금의] 상황들을 끌어온다. 모든 사람들은 땅, 물, 연료, 기타 필수자원들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석유나 다이아몬드 같은 다른 자원들로부터 생겨난 이익은, 주로 국민국가의 권위를 통해 공유되어야 한다. 또한 이러한 비유는 사이버테크놀로지와 비물질적 소유의 영역에서, 예컨대 ‘정보 공통재’나 ‘문화 공통재’를 보존하기 위한 논의들을 뒷받침할 때 사용된다. 이 경우 공통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비물질적 재화에 대한 소유권 할당이 비물질적 재화를 어떻게 공유되지 못하게 만드는지에 관한 비판과 유사한 방식으로 작용한다. 차이는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정보, 문화상품, 코드 같은 공통적인 재화가 천연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담론들 대부분은 모두 그 인공성과 생산과정이 아니라 접근과 분배에 초점을 두며, 이 역사적 비유가 환기되지 않을 때조차도 ‘공통재’를 유사자연 또는 적어도 주어진 것으로 취급한다.[각주:5] 

 

공통적인 것에 대한 랑시에르의 생각은, 비록 영국 역사의 비유를 통하기보다는 주로 고대 희랍 정치사상을 통해 발전시키고는 있지만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작용한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정치와 미학이 시작될 때 공통적인 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따라서 핵심적인 문제는 그 몫이 어떻게 공유되고 분배되고 분할되는가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공통적인 것을 더 이상 유사자연이나 주어진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 공통적인 것은 역동적이면서 인공적이며, 매우 다양한 사회적 회로들과 마주침들을 통해 생산된다. 이러한 인식은 나눔과 공통적인 것에 대한 랑시에르의 생각이 갖는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요성을 더욱 확대시켜 공통적인 것의 생산 또한 설명해준다. 나아가 이러한 관점은 우리로 하여금 경제적 영역을 정치적인 것 및 미적인 것과 함께 고려할 수 있도록, 아니 고려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공통적인 것의 생산이 오늘날 지배적인 경제양식으로서 출현하고 있는지를 인식할 수 있다. 



생산의 지배적 형태


공통적인 것의 생산이 현대 경제에 중심적이 되고 있다는 가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잘 알려진 몇몇 경제사적 동향을 상세히 기술하는 것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각주:6] 이 가설은 우리가 경제적 생산의 지배적 또는 헤게모니적 형태가 산업적 형태에서 비물질적 또는 삶정치적 형태로 이동하는 와중에 있다는 주장에 의거한다. 적어도 지난 150년간 산업생산이 다른 모든 형태의 경제적 생산에 지배적이었다고 말하는 데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산업생산의 지배는 양적인 측면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예컨대 맑스가 19세기 중반 산업자본의 지배를 제시했을 때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가장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였던 영국에서조차도 공장이 아니라 밭에 있었다. 산업생산은 질적인 측면에서, 즉 산업생산의 특질들이 다른 형태의 생산에 부과된 한에서 지배적이었다. 예를 들어 광업과 농업은 기계화, 분업, 임금관계, 훈육, 시간의 정확성, 노동일 등과 같은 산업적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산업화되어야 했다. 전 세계의 모든 생산형태와 사회적 관계 그 자체는 점점 산업생산의 특질들을 채택하도록 강요받았다. 산업생산이 적어도 지난 몇 십 년간 경제에서 더 이상 헤게모니적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제시하는 것 역시 특별히 논쟁적일 것이 없다. 이것이 양적인 측면에서의 주장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라. 전 세계를 통틀어 보면, 동일한 혹은 훨씬 더 많은 수의 노동자들이 공장에 있을 수도 있다. 비록 공장이 있는 곳이 세계의 선진적인 지역에서 후진적인 지역으로 극적으로 이동하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이것은 질적인 측면에서의 주장이다. 산업의 특질들이 더 이상 다른 생산형태에 부과되고 있지 않다는 의미인 것이다. 


토니 네그리와 내가 제시한 이 가설이 갖고 있는 잠재적인 논쟁적 요소는, 우리가 비물질적 또는 삶정치적 생산이라고 부르는 것이 점점 산업을 대신해 지배적인 위치에 들어서고 있다는 논의이다. 네그리와 나는 이러한 용어를 통해 경제의 다양한 부문들을 한데 묶는데, 여기서 는 정보, 아이디어, 지식, 언어, 소통, 이미지, 코드, 정동을 포함하는 비물질적인 재화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렇게 비물질적 생산에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머나 금융전문가 같은 최첨단 경제에서의 상징적‧분석적 업무뿐만 아니라 보건의료 노동자, 소방관, 법률비서, 패스트푸드 노동자, 콜센터 노동자 같은 말단에 있는 다양한 직업군 역시 포함된다. 여기서 비물질적이라는 용어가 주로 노동과정이 아니라 생산물을 가리킨다는 점에 주의하라.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노동은 여전히 근력을 사용하는 일과 지적인 일, 육체적인 일과 인지적인 일의 혼합으로 특징지어진다. 여기서 말하는 생산물이 대부분 완전히 비물질적이지 않다는 점에도 주의하라. 가령 정보, 아이디어, 코드는 항상 어떤 물질적인 측면을 갖는다. 정동 생산의 경우에도 물질적 생산물이 포함된다. 보건의료 노동자는 상처를 꿰매고, 패스트푸드 노동자는 햄버거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자들은 행복감을 창출하는 것, 친근감을 주는 것 등 광범위한 정동적 요소 역시 포함하고 있으며, 단지 포함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주를 이룬다.   


네그리와 나의 가설은, 우리가 이러한 비물질적 생산 형태가 경제에서 헤게모니적이 되고 있는 이행의 시기를 관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복하건대, 이는 비물질적 생산 형태가 수적으로 가장 많아질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특질이 점점 다른 생산형태에 부과될 것이라는 뜻이다. 산업은 점점 정보화되고 있으며 점점 이미지 지향적이 되어가고 있다. 종자의 생식질 형태의 정보가 농업에서 점점 중심적이 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노동일로 엄격하게 구분되는 산업의 시간성은 비물질적 생산 형태를 특징짓는 시간성으로 대체되고 있다. 이는 주로 불안정한 형태의 노동관계를 통해 노동과 삶의 경계를 무너뜨려 노동시간과 비노동시간의 구분을 점점 희미하게 만든다. 생산의 이 새로운 지배적 형태는 새로운 그리고 종종 가혹한 고통, 소외, 착취 방식을 낳으며, 그래서 새로운 분석과 조직된 저항전략이 필요하다. 



공통적인 것의 생성효과 


이 글에서 나의 논의를 전개하기 위한 이 가설의 핵심 요소는 공통적인 것의 생산이 경제에 중심이 된다고 상정하는 것이다. 먼저, 여기서 다뤄지고 있는 비물질적 생산물은 대체로 희소성의 논리에 따라―물질적인 상품들이 작동하듯이―작동하지 않는다. 내가 자동차나 집을 이용하면 당신은 그것을 이용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이디어나 이미지는 내가 이용한다고 해서 나에게 독점되지 않는다. 사실 아이디어나 이미지가 생산적이기 위해서는 공유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확장되어가는 나선형을 그리며 더 많은 아이디어와 더 많은 이미지를 창조할 수 있도록 말이다. 예컨대 과학적 지식은 매우 다양한 과학적 아이디어와 방법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공통적인 기반 위에서 과학적 지식의 진보가 산출되며, 지식의 진보가 일어나면 이번에는 그 새로운 지식이 컨퍼런스와 저널을 통해 공통적이 된다. 공통적인 것과의 이러한 이중의 관계―그 기반이자 결과―는 다른 형태의 지식 생산은 물론 이미지의 생산이나 기타 다양한 비물질적 재화의 생산까지 특징짓는다. 아마도 공통적인 것의 중심성은 사회적 관계들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정동적‧언어적 생산에서 훨씬 더 명백할 것이다. 사회적 관계는 즉각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생산의 사회적 형태이며, 이는 지속적으로 공통적인 것에 기초하는 동시에 공통적인 것을 생성한다. 이 경우 생산물을 사적으로 만드는 것, 그래서 생산물을 공통적인 것에서 도려내는 것은 모두 그 생산성을 갉아먹는 짓이다.   


가장 일반적인 용어를 사용하자면, 이러한 생산 형태는 삶형태의 재생산 또는 생성을 목표로 한다. 달리 말해, 이로써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종점을 상품의 측면에서 생각한다거나 자본을 하나의 사물로 생각하는 대신, 맑스가 제시했듯이 자본을 사회적 관계로 간주하고 자본주의적 생산을 사회적 관계의 (재)생산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상품생산은 정말이지 사회적 관계 및 삶형태 생산의 중간지점에 지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자본이 공통적인 것의 생산을 명령하고 생산된 공통적인 부를 수탈할 방법을 찾으면서 공통적인 것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연구하는 것이 필수적일 것이다. 공통적인 것의 생산은 곧 삶형태의 생산이므로,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 나는 그저 이것을 왜 삶정치적 생산이라고 부르는지 그 이유를 강조하고자 한다. 



삶정치


이것을 삶정치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통상적으로 경제적 생산을 정치적 행동과 분리시키는 것으로 간주되는 특징들이 공통적인 것의 생산이라는 맥락에서 붕괴되어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나 아렌트는 노동 또는 경제적 생산을 공장에서의 상품생산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도구적 행위로서 이해한다. 즉 노동은 그 생산물의 유용성을 낳고 소진되어버리는 것이다. 반면 정치적 행동―아렌트에게 있어 타자 앞에서의 발화(speaking in the presence of others)가 그 전형적인 특징인―에는 그 목적을 달성하고 소진되어버리는 일이 없다. 정치적 행동은 오히려 계속적으로 열려 있는 소통과 협력의 장이다. 아렌트의 이러한 구분은 부분적으로 공통적인 것과의 관계에 의거한다. 정치적 행동 및 정치적 발화는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공통적인 세계에 생명을 불어넣는 반면, 경제적 생산은 공통적인 것에서 배제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시장교환이라는 구체화된 영역을 통해 공통적인 것의 왜곡된 판본에만 접근할 수 있을 뿐이다.[각주:7] 이러한 아렌트의 구분을 산업생산의 맥락에서는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경제적인 것이 아렌트가 정치적인 것과 동일시하는 특질들을 취하는 비물질적 생산에서는 그 조건들이 분명하게 변화하고 있다. 자본이 계속해서 도구성을 부과할지라도 비물질적 생산물은 사용된다고 소진되는 것이 아니다. 가령 서비스관계에서 창출된 정동이나 광고캠페인에서 창출된 이미지 및 아이디어는 자본이 설정하는 도구적 목표를 항상 초과한다. 더구나 그러한 생산은, 아렌트가 정치적인 것에 중심이 되는 것으로 규정하는 언어와 발화로 특징지어진다. 

 

현대 경제적 생산의 삶정치적 성격을 인식하는 것은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이 합쳐졌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랑시에르가 미학과 정치의 관계를 제시하는 방식과 유사한 것으로서, 이 두 영역이 공히 공통적인 것의 생산, 즉 사회적 관계와 삶형태의 창조를 향해있다는 측면에서 연결되어있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우리의 간략한 분석은 삶정치적인 경제적 생산에서 생성되고 채택되는 재능 및 기술이 정치적 행동에 필요한 재능 및 기술과 동일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당연하게도 이는 삶정치적 생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즉각적으로 정치적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정치적으로 행동할 수 있음을, 그들이 필수적인 역량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주장은 민주적 참여의 가능성과 관련하여 큰 중요성을 갖는데, 이는 별도의 글에서 탐구되어야 할 것이다.


경제적 측면에서 공통적인 것의 생산이 갖는 중심성을 입증하기 위해 먼 길을 둘러왔다. 이제 나는 랑시에르의 통찰로 돌아가 그가 제시하는 접속에 연결고리를 하나 더 추가하여, 미적인 것, 정치적인 것, 경제적인 것―이 삼자는 공히 공통적인 것의 생산을 향해있다―간의 연동관계를 만들어낼 것이다. 랑시에르가 미학과 정치 모두 감각적인 것의 나눔, 즉 공통적인 것의 공유‧분배‧분할을 작동시킨다는 측면에서 양자의 접속을 제시할 때, 그는 공통적인 것을 마치 주어진 것처럼 또는 상대적으로 고정된 요소인 것처럼 취급한다. 우리가 공통적인 것이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 그래서 우리의 초점을 공통적인 것의 생산으로 옮기면, 이러한 정의에 약간의 변화가 생긴다. 정치는 분배뿐만 아니라 공통적인 것의 생산, 즉 사회적 관계와 삶형태의 생산 및 재생산 역시 포함한다. 그리고 이는 공통적인 것의 생산이 경제적 영역에서의 삶정치적 생산과 일치함을 강조한다. 이러한 생각은 예술적 실천의 창조적 성격뿐만 아니라 경제적 생산 및 정치적 행동의 창조적 성격 또한 역설하며, 창조에 필요한 역량‧기술‧재능을 강조한다.[각주:8] 따라서 예술, 정치, 경제, 이 세 영역은 모두 공통적인 것을 거쳐 연결되며 모두 사회적 관계 및 삶형태의 생산을 향해있다.  



예술가에 관한 물음들


예술, 정치, 경제의 관계를 이런 식으로 제시하는 것이 갖는 한 가지 중요성은, 그것이 경제적 생산과의 관계에서 예술 및 예술가가 하는 역할을 새롭게 조명한다는 점에 있다. 예컨대 유럽 전역의 지방정부들(다른 곳에서는 그 정도가 덜하다)은 산업적 기반이 쇠퇴하고 삶정치적 생산이 점점 더 우세해지고 있음을 인식하면서, 스스로를 ‘창조도시’로 브랜드화하고자 하며 ‘창조계급’을 구축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인 예술가들의 환심을 사려 한다. 리처드 플로리다의 저작은 창조도시를 만들기 위한 정부의 여러 가지 노력들에 핵심적인 영감이 되어왔다.[각주:9] 같은 선상에서 최근 몇 년간 불어나고 있는 아트 비엔날레는 창조경제가 낳는 이익을 포획하려고 노력하는 도시 브랜드화의 한 양식으로서 기능한다. 물론 예술 진흥 및 후원은 국가권력의 품격의 상징으로서 오랫동안 기능해왔지만, 오늘날 예술적 실천은 경제적 생산과 훨씬 더 강한 연관을 획득하고 있다. 도시 또는 지역에 예술가들이 존재하는 것과 예술적 생산을 용이하게 하는 사회적 조건들이 나타나는 것은, 삶정치적 생산의 발전을 끌어 모으기 위한 상징으로서 간주될 뿐만 아니라 삶정치적 생산의 회로들을 촉진시키면서 그러한 발전에 작용하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삶정치적인 경제적 생산의 재능 및 기술이 정치적 행동에 필요한 재능 및 기술과 동일하다는 나의 주장과 유사하게, 자본주의의 계획자들이 예술적 실천의 재능 및 기술이 경제적 생산에 필요한 재능 및 기술과 점점 더 동일한 것이 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술 및 예술적 실천의 이 점증하는 경제적 중심성은 물론 예술가에게 유익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심성이 의도치 않게 예술 및 예술적 실천을 자본주의 발전 프로젝트에 휘말리게 할 수도 있다. 


어떤 예술가들은 이러한 경제적 생산과의 관계를 아주 다른 방식으로 펼쳐가고 있는데, 그들은 삶정치적 경제에서 자신들이 점점 매우 다양한 노동자들과 같은 노동조건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프랑스의 (TV, 영화, 무용, 연극 같은 엔터테인먼트산업 노동자들로 조직된) ‘쇼비즈니스 비정규직’ 연합(the Coordinations of the ‘intermittents du spectacle’)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2003~2007년 이들은 단기계약을 맺어 드문드문 일할지라도 계속 소득을 받을 권리를 유지시키기 위해 광범위한 항의를 진행했는데, 프랑스 내에서 이와 유사한 불안정한 노동조건 하에서 일하는 노동력의 비중이 점점 더 증가하고 있음을 인식했다. 그래서 이 연합은 자신들의 요구를 확대시켜 프랑스의 모든 노동자들에게 지속적인 기본소득을 지급할 것을 요구하면서 자신들의 투쟁을 다른 불안정노동자들의 투쟁과 연결시켰다.[각주:10] 내가 보기에 이것은 갈수록 연동되어가는 예술적 실천과 경제적 생산의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한 흥미로운 경로이다.   


이러한 연동에 대한 분석은 나를 예술과 정치의 관계로 다시 데려다 놓으며 일련의 물음들을 던진다. 예술적 실천과 정치적 행동이 공히 공통적인 것의 생산 및 분배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삶정치적 맥락에 어떠한 가능성들이 열리게 되는가? 이러한 관계가 오늘날 전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통적인 것을 방어하는, 공통적인 것의 공정한 분배를 위한, 공통적인 것의 생산의 자율을 위한 여러 정치투쟁에 참여할 수단을 예술가에게 제공하는가? 앞서 내가 주장했듯이 삶정치적인 경제적 생산에 필요한 재능 및 기술이 정치적 행동에도 적용되며 예술적 실천의 창조적 역량이 경제적 생산에 필요한 것과 동일하다면, (내가 주장한 세 가지 연동관계를 완성시키는 질문으로서) 예술적 실천에서 펼쳐지는 능력이 오늘날 점점 정치적 행동에 필요한 능력이 되어간다는 것 역시 사실인가? 그러한 예술적 재능 및 기술이 공통적인 것의 방어‧생산‧분배라는 민주적 기획에서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가? 미적인 것, 정치적인 것, 경제적인 것의 연동관계에 대한 간략한 분석이 나로 하여금 이러한 물음들을 던질 수 있게 하지만, 아직 어떠한 대답에도 도달하지 못한 상태이다. 이 물음들에 대답하는 데 나보다 예술가들이 더 적임자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예술가들이 이 물음들에 대한 답을 이미 자신의 노동 속에서 발견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1. 랑시에르, 『감성의 분할』, 가브리엘 록힐 역, 영역 수정. [본문으로]
  2. 가브리엘 록힐은 영어에서 ‘the common’이라는 표현이 까다롭기 때문에 ‘something in common’, ‘what is common to the community’ 같은 다양한 명사구나 ‘shared’, ‘communal’ 같은 형용사로 대체함을 설명하는 친절한 주석을 제공하고 있다. [본문으로]
  3. 랑시에르, 『감성의 분할』. 랑시에르의 『불화』 또한 참조하라. 참고로 『불화』의 영역자 줄리 로즈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 partage du sensible’을 ‘partition of the perceptible’로 번역하고 있다. [본문으로]
  4. 랑시에르, 『불화』, 영역 수정, 강조는 원문. [본문으로]
  5. 이 역사적 비유에 대해서는 피터 라인보우의 『마그나카르타 선언』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6. 지배적인 경제 형태의 산업생산에서 비물질적 또는 삶정치적 생산으로의 이행이라는 가설에 대한 더욱 자세한 연구는 네그리‧하트, 『다중』, 『공통체』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7.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본문으로]
  8. 예술을 공통적인 것의 분배일 뿐만 아니라 공통적인 것의 생산이기도 한 것으로 특징짓는 것은, 예술을 퍼셉트(percept)와 어펙트(affect, 정동)의 창조로 파악한 들뢰즈‧가타리의 생각과 공명한다.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9. 예컨대 『CREATIVE CLASS 창조적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들』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10. Antonella Corsani and Maurizio Lazzarato, Intermittent et precaires (Paris: Editions Amsterdam, 200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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