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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공통재와 공공재를 구별해야 하는가 - 제임스 B. 퀼리건 본문

옮기다

왜 공통재와 공공재를 구별해야 하는가 - 제임스 B. 퀼리건

은혜 Graco 2016. 4. 3. 22:30

원문 http://wealthofthecommons.org/essay/why-distinguish-common-goods-public-goods




왜 공통재와 공공재를 구별해야 하는가

 

 

제임스 B. 퀼리건 | 은혜 옮김

 

 

* 제임스 퀼리건(James Quilligan, 미국)1970년대부터 <커먼 헤리티지 Common Heritage>와 국제개발 분야에서 활동해왔으며, 공통재의 인식론존재론과 정치 및 통화 구조와의 관계를 전문으로 한다.

 

 

2008~2009, 심각한 경기후퇴와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그 여파로 인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세계 경제로 쏠렸다. 그리하여 더 나은 정책, 법률, 제도가 필요하다는 합의가 무르익고 있는데, 과연 이다음 경제는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과 생명체에게 공정하고 평등할까? 그것은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더욱 현실적인 인식론이 전지구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전까지는 민주적으로 재구축된 경제 시스템을 만들고자 하는 정치적 의지가 생겨날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전지구적인 경제적사회생태적 조율을 위한 새로운 해법을 평가하고 승인하는 것이 요구될 때, 이러한 계획들을 사람들이 간단명료한 언어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공유의 경제는 정치적 이해관계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세계와 그 하위체계들이 실제로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기초해야 한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사실상 사유재(기업이 만든 상업적인 제품 및 서비스)와 공공재(주권 정부가 제공하는 교육, 공원, 도로, 공공안전, 위생, 수도전기가스 같은 공공설비, 법체계, 국방)의 차이를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사적 소유와 공통적 소유의 대비(對比) 또한 매우 뚜렷해졌다. 우리는 소유자가 명확한 데이터와 자유롭게 사용가능한 정보의 차이, 혹은 시장에서 파는 열매와 산에서 딸 수 있는 열매의 차이를 일상생활에서 쉽게 알 수 있다.[각주:1]


그러나 세계에 존재하는 집단적 소유의 이 두 가지 기본 형태, 즉 공공재와 공통재의 차이는 종종 희미하다. 우리 앞에 놓인 큰 과제들 중 하나는, 공공재와 공통재사람들이 사회적 또는 관습적 전통규범관행을 통해 자신들이 지킬 규칙을 직접 협의하여 운영하는 공유되고 있는 자원(shared resources)를 강력하고 널리 인식되는 방식으로 구별해내는 것이다.[각주:2] 이러한 구별은 중심축을 이루는 것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공통재가 경제생태사회 정책 속에 포함되기 위해서는 공통재가 가진 무매개성(immediacy)이 모든 사람들에게 명명백백해져야 한다. 공통재에 대한 인지적 이해는 사적 소유와 공적 소유라는 종획된 공간을 넘어 공유한다는 사태를 경험하고 파악하는 우리의 능력을 틀림없이 북돋아준다. 형식적인 범주가 사유재, 공공재, 공통재의 구별을 명확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그러한 범주는 공통재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는 인간적인 의미, 존재, 상호주체성에 대한 감각을 전달해주지 못한다. 실제로 공통재에 관한 많은 문헌들이 이러한 감각을 전달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사람들은 간혹 공통재가 대립적’(한 사람이 사용하면 다른 사람이 사용할 수 없다)이지만 비배타적’(다른 사람들이 자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배제하는 것이 어렵거나 불가능하다)이라고 간주한다.[각주:3] 이런 해석은 단박에 알아차리기 어려운, 다루기 힘든 주장이다. (그리고 이 책에 실린 헬프리히의 글에서 지적되듯이 개념적으로 빈약한 주장이다.) 이러한 직관적이지 못한 규정이, 공통재가 많은 사람들에게 그토록 추상적으로 보이는 이유일까? 공통재가 공공재와 공통재를 구별해내는 많은 분석들을 필요로 한다면, 공통재의 존재론적 실재는 어떻게 인식될 수 있을까?

 

이 글은 공적 소유의 배경을 이루는 여러 가지 이론적실천적 가정들을 검토함으로써 공공재와 공통재를 구별짓는다. 아래의 소절들에서는 이러한 구별의 다양한 측면들을 다루며, 공통재에 관해 널리 공유되고 있는 세계관이 왜 지구의 민주적 미래에 결정적인지를 설명한다.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공통재가 하는 역할을 인정하면, 세계 경제를 변형시키고 전지구적인 대의적 협치를 창출할 인식론적정치적 수단을 확보할 수 있다.

 


공공재와 공통재의 혼동을 불식시키기

 

공공재와 공통재를 대비시키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 특정한 자원이 사회적 명령으로서의 관리를 필요로 하는가, 아니면 그 자체로 사회적 상호성과 협력의 표현인가? 달리 말해, 이러한 재산/소유(property)는 정부에 의해 가장 잘 유지되는가, 아니면 공중(公衆)에 의해 가장 잘 유지되는가? 이는 유용한 출발점이 되는데, 한발 더 나아간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공적(公的)’이라는 것과 공공재를 통해 정확히 무엇을 의도하는가? 폴 새뮤얼슨 같은 전후(戰後) 경제학자들은 공공재의 비대립적 성격을 확인했고, 제임스 M. 뷰캐넌과 빈센트 오스트롬은 공공재의 비배타적 측면을 서술했다.[각주:4] 이러한 규정들은, 1930~1950년대에 서방 정부들에 의해 널리 채택되었던 존 메이너드 케인즈의 이론정부의 경제 개입은 더 많은 일자리와 더 높은 임금을 통해 사람들의 소비욕구를 충족시키는 방법이다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유효수요를 명확히 하는 케인즈주의적 정책들은, 개개인의 구매력(부를 창출하는 행위에 박차를 가하는 시장의 힘)개인적인 선호 충족’(시장 외적인 충족을 포함하는 더욱 폭넓은 인간적 욕구와 욕망)을 뒤섞어버린다. 그 결과, 케인즈주의 경제는 사실상 공통재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간과한다. 정부가 자극하는 지출 및 소비는 식량, , 공기, 지식, 공동체 네트워크, 사회적 테크놀로지를 시장 상품으로 간주할 뿐, 자연적으로 재생가능하거나 자기생성적인(self-generated) 사회적 자원으로는 간주하지 않는다. 요컨대 국가에 의한 공공재 공급은, 자기조직적(self-organized)이며 사회적으로 협의된 자원 생산사용보호를 통해 소비자들이 얻게 될 총 순이익이 [국가에 의한 것보다] 더 높다는 점을 해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공통재는 케인즈주의적 사유에서는 명확한 실재를 가질 수가 없다.


1980년대 이후로 국가는 주로 사적 소유, 자유 시장, 자유 무역의 권리를 신장시키는 데 관여해왔다.

 

이는 공적이라는 것의 의미를 공통적 소유와 훨씬 더 동떨어진 것으로 변형시켰다. 신자유주의의 도래와 더불어 이제 공공부문[공적 영역]은 자신의 자원을 자신의 집단적 이익을 위해 스스로 공급하는 시민들이 아니라, 개개인의 행복을 사적인 시장 상품이는 여전히 공공재라고 불린다을 통해 증진시킬 것을 요구하는 정부의 공급 제도를 가리킨다. 우리가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자원들은, 신비화하는 교묘한 수법을 통해 공공재로 규정된 다음 생산과 분배를 위해 탈규제화되어 민간부문[사적 영역]으로 넘어간다.

 

마술사의 속임수처럼 교묘한 범주 바꿔치기를 통해 공통재는 사라져버린다. 예전에 그것을 어디서 봤는지는 잊어라. 지금 어떤 법적 틀(legal container)이 재화를 쥐고 있는가? 이런 식으로, 한때 공통재 또는 공공재로 운영되던 재화, 식량, , 에너지, 보건시설, 학교, 문화, 토착공예품, 공원, 지역사회 공간설정(community zoning), 지식, 통신수단, 통화(通貨), 생태자원 및 유전자원는 완전히 사유화되거나 이름뿐인 공공재 또는 공통재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재화를 (비대립적비배타적이라고 공언함으로써) ‘공적이라고 칭하는 것은, 모든 재화를 궁극적으로 사유재로 (그리하여 대립적이고 배타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신자유주의 독트린을 받아 안으면서 공통재에 대한 케인즈주의적 거부를 한 단계 더 밀어붙이는 것이다.

 

이러한 법적언어적 바꿔치기는 공통재를 사라지게 할 뿐만 아니라, ‘공적이라는 말까지도 사람들에게서 앗아간다. ‘공적이라는 말은, 지역의 자원을 운영하고 사회적 또는 생태적 요구를 표현할 공동체의 권한을 더 이상 의미하지 않는다. 이제 공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자원 통제권을 넘겨준 중앙관리권력을 뜻하며, 이 권력은 종래의 사적 시장을 통해 우리의 요구를 충족시킨다. 모두가 (편파적인 다수세력, 법치, 행정, 사법적 판결을 통해) 정부의 의사결정에서 배제된 대중들 사이에 단절이 점점 더 커져가는 것과 상대적으로 극소수의 사람들이 자기의 사적 이득을 불리는 과정을 지배하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그러나 공적이라는 단어가 배제된 대중과 특권을 누리는 내부자들 모두에게 관성적으로 적용되고 있음에도, 그에 대한 항의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공적이라는 단어의 손쉬우면서도 잘못된 이러한 용법은 계속 유지되는데, 그 주된 이유는 시민들이 공통재와의 직접적인 소통과 연결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한때 공공부문을 자원을 소중히 관리할 수 있고 사적 시장을 무화시킬 권위를 주장할 수 있는 우리의 집단적 잠재력과 연결시켰던 강력한 인식론적 준거틀은 사실상 사라졌다. ‘공적이라는 말은 이론상으로는 여전히 사람들[민중]을 의미하지만, 실제로는 정부(사람들의 정치적 권리와 공통재 통제 능력을 일정하게 방해하는 엘리트들의 이해관계에 포획된 것으로서의 정부)를 의미한다.

 


생산자와 소비자를 통합하기

 

공공재와 공통재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역할 및 정체성의 차이를 해소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이것은 중요한 지점이다. 현재의 시스템에서 시장은 공통적인 영역(그것이 토지, 천연/광물 자원 같은 물질적인 것이든 문화, 아이디어, 디지털 공간 같은 비물질적인 것이든)을 종획함으로써 가치를 창출한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분업은 사유재와 공공재의 흐름 속에서 위계적인 하향식 구조를 통해 형성된다. 이는 재화 및 서비스의 비용을 낮추면서 경제적 효율성과 생산성, 품질을 높이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러나 많은 대안적 공동체들은 자신의 집단적 자원을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관리할 일련의 규범과 규칙을 개발했다. 이러한 공통재가 전통적인 것(, , 토착문화)이든 새롭게 등장한 것(태양에너지, 협력적 소비, 인터넷)이든, 자기조직적 공동체들은 자신과 미래 세대를 위해 지역의 자원을 보존하고자 집단행동에 나선다. 이러한 공통재를 생산하고 운영하는 데 핵심적인 원칙들이 실제로 신자유주의에 의해 이상화된다는 점을, (시장을 통한) 자생적이고 자기조절적인 자유와 (국가가 강제하는) 규칙에 기초한 평등으로 이상화된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소비자들이 자신의 공통재를 통해 재화 및 서비스의 공동생산자가 되기로 하면, 그들의 상호적이고 통합적인 노동은 신자유주의의 전제들을 뛰어넘게 된다. 공통재를 통해 표현되는 자유와 평등이 사유화[민영화]나 중앙집중적 제도나 사회적 위계의 최상층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자원 이용자들이 생산과정에 직접적으로 연결되면, 지역의 아이디어, 지식, 상상력, 숙고, 자기교정 조치가 그들의 협력적 활동 속에서 직접적으로 구현된다. 상업 배송망이나 국가의 관료제적 공공재 및 공공서비스 공급과 달리, 개개인의 선택의 자율성은 자원 이용자들의 협력적인 가치 생산과 협치를 통해 가장 잘 보장된다. 공동생산이라는 탈중심적인 자치 시스템은 자원에 대한 더욱 공정하고 더욱 직접적인 접근을 (그리하여 더 높은 효율성을) 제공하는데, 이는 사적인 독점기업이나 국가 위계체계로서 운영되는 분배지향 기업(distributive enterprises)[각주:5]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공정하고 직접적이다. 이로써 생산수단과 의사결정의 분배는, 근대적인 시장/국가의 하향식 시스템을 통할 때보다 훨씬 더 넓게 확대된다. 따라서 지역 차원에서 직접적으로 운영되는 공통재는 근대적 분업을 넘어서는 협치 및 생산 영역을 구성한다.

 

 

사회헌장과 공통재 트러스트를 확립하기

 

공통재와 공공재를 구별하는 것은, 생계와 복지를 위해 특정 공통재에 의존하는 이해당사자들이 계약과 제도를 개발하는 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단계이다. 실천 공동체나 지역 전반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자원을 유지시킬 책임을 맡을 경우, 그들은 사회헌장을 통해 이를 정식화할 수 있다. 이 헌장은 공유되고 있는 자원에 대한 집단의 권리와 장려책의 밑그림이다. 이 헌장은 자원과 그 이용자운영자생산자의 관계 유형을 서술한다. 사회헌장은 숲, 목초지, 관개시설, 대수층[지하수를 품고 있는 지층], , 호수, 어장, 지식, 유전자원, 공중보건, 에너지, 풍광, 유적지, 문화지역(cultural areas), 정치적 안보 지역(political security regions)을 위해 개발되어왔다. 사회헌장은 다른 많은 영역들에도 적용될 수 있다.

 

사회헌장이 실제로 작동하도록 하기 위해, 자원 이용자 및 생산자들은 트러스트(trust)로서 운영되는 시민 이해당사자들의 법인체(legal entity)나 신탁협회(fiduciary association)를 개발할 수 있다. 공통재 트러스트는 보통 고갈될 수 있는 자원(천연자원, 물질적 자원)을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지는데, 계속 공급 가능한 여러 공통재(사회적문화적지적 공통재, 디지털 공통재, 태양에너지) 역시 그것의 재생을 보장하는 트러스트를 통해 이득을 볼 수 있다. 수탁자들(trustees)은 지속가능성, 삶의 질, 행복 같은 화폐화되지 않으며 기존 세대와 미래 세대 모두를 고려한(inter­generational) 측정기준에 따라 자원 추출 또는 이용에 상한을 설정한다. 예컨대 유전, 대수층, 대기의 장기적인 이용가능성을 보장하는 트러스트가 개발될 수 있다. 트러스트는 미래 세대를 위해 공통재를 안전하게 보호하면서, 민간부문이나 국가사업 및 공공설비에 설정된 추출생산 상한에 따라 자원의 일부를 임대할 수도 있다. 임대료의 일부는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주변화된 사람들에게 중점을 두어, 국가에 의해 세금이 부과되거나 시민들에게 이익배당 또는 생계소득으로서 재분배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임대료나 이용료가 고갈되는 자원(가령 토지, , 바다, 공기)의 복구와 계속 공급 가능한 자원(예술, 공동의 지식, 디지털 코드, 태양에너지)의 강화에 재투자될 수도 있다. 이러한 다양한 트러스트를 통해 전방위적인 공통재 기반 경제가 창출될 수 있을 것이다. 즉 공통재는 미래를 위해 보호될 것이고, 민간부문은 임대할 자원을 산출함으로써 이익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국가는 이 임대료에 세금을 부과하여 파괴된 공통재를 복구하고 사회적 배당금을 적립하고 자유 문화(free culture)를 장려할 것이다.

 

 

시민사회의 새로운 정체성을 개발하기

 

사회의 어느 부분이 사유재와 공공재 말고 공통재를 가장 잘 후원할 수 있을까? 시민사회는 헤겔의 철학에서 시작하여 최근 수십 년간 점점 변화를 거쳐 시장과 국가 너머의 3영역으로 규정되었다. 지구적 네트워크, 비정부기구, 시민결사체, 사회운동은 이해관계를 규명하고 대의되지 못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옹호함으로써 지구적 여론의 진정한 목소리가 되었다. 실제로 이들이 추구하고 있는 이해관계의 많은 부분건강에 좋은 음식, 깨끗한 물, 깨끗한 공기, 환경보호, 녹색에너지,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 사회적 테크놀로지, 인권, 토착민들의 권리은 공통재로서 운영될 수 있는 공유자원(common pool resources)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선택적 집단들은 전지구적 대의민주주의의 권위를 갖지 못한다. 이는 여론에는 선거과정을 통한 사람들의 투표라는 정당성이 결여되어 있어서 사회 내 정치적 평등을 높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뢰할만한 정치적 권위가 없는 경우, 일반적으로 시민사회는 지구적 권위를 특정하게 적용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할 뿐 그것의 근본적인 구조에 문제를 제기하는 일은 드물다. 대부분의 시민사회단체들은 (개인의 권리, 사적 소유, 주권이 미치는 국경을 최우선시하는 것을 포함하여) 신자유주의를 구성하는 전제를 긍정하고 옹호하는 가운데,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고정되어있는 분업을 그리고 공통재의 종획을 지지한다. 이것이 시민사회를 기업과 정부에 의존적인 상태로 그리고 착취에 취약한 상태로 방치한다. 시민사회는 진정한 반대세력으로 서지 못하기 때문에, 변화를 낳는 대안으로서 입지를 다질 때 거대한 장애물에 직면한다.

 

바로 여기서 시민사회는 공통재 그룹들로부터 자원 이용자들을 생산과정으로 끌어들이는 것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공통재는 자신의 재화를 소비하는 생산자를 포함한다. 자원 이용자들이 동시에 공동생산자일 때, 그들의 열의, 지식, 기술은 생산 실천의 일부가 되며 상호작용하고 사회적경제적 삶을 조율하는 새로운 방식을 낳는다. 그러면 함으로써 배운다’(learning-by-doing)는 새로운 생산 및 협치 논리가 가능해진다. 시민사회는 공동생산 및 공동협치라는 혁신적 수단을 채택함으로써 이 원칙을 자신의 과업에 적용할 것이다.[각주:6] 예컨대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P2P(peer-to-peer) 방식의 창조성 및 운영 형태가령 자유소프트웨어, 오픈 하드웨어 그룹, 월가점령운동에 의해 입증된 수평적 의사결정는 시민사회단체들에게 (시장주도적인 가치와 구조 대신) 오픈소스의 가치와 구조를 채택하는 법을 가르쳐줄 수 있다. 시민사회단체들은 자원 이용자이자 생산자로서 작용하여 지역의 이해당사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힘을 펼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집단적 권리와 도덕적 정당성 그리고 국가 너머에 존재하는 시민들의 힘의 범위를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세계의 시민사회단체들은 전지구적인 공통재 운동에서 자신의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발견함으로써 집단행동, 사회적 연대, 직접민주주의를 위한 토대를 현재의 것보다 더욱 역동적인 것으로 발전시킬 것이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통합을 위한 촉매로서, 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은 지역/권역별 평의회와 공통재 트러스트로 발전할 수 있으며 서로 파트너십을 형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책임구조를 통해 시민들에게 제공되는 참여와 정치적 선택의 증진은, 공통재의 모든 수준(지역적 수준, 일국적 수준, 국가 간 수준, 권역 수준, 전지구적 수준)에서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의사결정을 변화시킬 것이다. 이는 사회적 자원과 천연자원의 재분배에 대해 시민사회단체들이 갖고 있는 국제주의적 이상(理想)들 간의 모순을, 그리고 기업과 국가가 공통재의 공정한 접근보호사용에 가하는 제약을 문제 삼는 것에 대한 재정적정치적 두려움을 해결할 것이다. 새로운 형태의 참여와 수탁경영(trusteeship)을 통해 공통재의 집단적 생산 및 협치를 촉진함으로써, 시민사회의 다양한 운동들은 자신이 대표한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에 대해 훨씬 더 책임 있는 모습을 갖게 될 것이다.

 

 

지구시민들에게 주권을 부여하기

 

공통재와 공공재를 구별하는 것은 우리가 지구시민으로서 갖고 있는 공통재에 대한 근본적인 권리를 깨닫는 데 결정적이다. 현재 지구시민권에 대한 권리는, 시민의 대표성이 국가에 부여되어 국가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에 인정되거나 긍정되지 않고 있다. 일국의 시민으로서, 우리는 암묵적인 사회계약을 통해 정부에 권력을 부여한다. 보호, 안보, 인프라, 기타 서비스 등 공공재를 얻는 대신 국가에 정당성과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우리의 지극히 인격적(personal)이고 주체적인(subjective) 의사결정 권력을 정부에 넘겨줄 때 (정부는 기업에 사유재를 생산분배할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이 권력을 재배치한다) 정체성과 목적을 가진 적극적 시민권이라는 생각은 심각하게 약화된다.

 

그러나 주권자는 집단으로서의 인류이지 그들의 정부가 아니다. 사람들의 이 절대적 권리는 영토에 미치는 권한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관습으로 내려온 또는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생태환경과의 밀접한 관계(identification)집단적 노동 형태, 사회적 테크놀로지, 공동체의 필요나 공유된 신념, 문화적 자원 지역, 종족적종교적언어적 친연관계, 역사적 정체성에서 비롯된다. 집단을 이룬 사람들이 삶과 발전을 떠받치는 공통재의 능력이 쇠퇴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면,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공동체 수준에서 그리고 전지구적 수준에서 자원, 협치, 사회적 가치에 대한 장기적인 권한을 자신의 지구적 생득권으로서 요구하도록 만들 것이다.

모든 자원대기, 해양, , (), 식량, , 에너지, 보건, 테크놀로지, 미디어, 무역, 금융에 대한 이러한 생득적 권리는, 공동체가 생존과 안전을 위해 특정한 공통재에 의존한다는 사실에서 그리고 미래 세대의 복지를 지켜낼 의무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생존 및 생계 욕구는 이러한 지역 집단들에 새로운 도덕적사회적 책임을 부여하는 데, 이는 자원 이용자들을 공통재에 대한 접근과 그것의 보존 및 생산에 직접 참여시키기 위해서이다.

 

커머너들[공통재와 공통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국가로부터 나오는 개인의 권리나 시민권을 추구하는 대신, 지구시민으로서 공유되고 있는 자원에 접근하고 이를 보호생산운영사용할 자신의 주권적 권리를 선언한다. 공통재에 대한 사람들의 주권은 지구시민권을 통해 정당화되며, 이 지구시민권은 공통재에 대한 지역적 주권을 통해 정당화된다. 이는 순환논증이 아니다. 세계 자원의 수탁자로서 공통적 소유의 모든 수준에서 국가기관의 권위를 초월하고 사람들의 요구의 정당성을 인식하는 것은 곧 다층적(multi-scale) 의사결정과 지구적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전지구적 공공재주장을 논박하기

 

지난 몇 십년간 정부 간 시스템(intergovernmental system)은 세계 모든 사람들과 환경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능력을 전지구적 공공재를 통해 증명해왔다. 케인즈주의적 국제주의와 기업/금융 신자유주의가 혼합된 이 개념은, 현재의 전지구적 공통재 운영에 있어 이해와 비전이 결여되어있음을 보여준다. 새뮤얼슨/뷰캐넌/오스트롬의 정의에 따르면 비대립적이고 비배타적인 공공재는, 사법적 경계 안에서 주권 정부에 의해 시민들에게 제공되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러나 이 모델은 (개별 국가의 연합을 통해서든 전지구적인 제도적 틀을 통해서든) 세계 시민들에게 공공재를 제공할 대의체(representative authority)가 존재하지 않는 다자적[다국적] 수준에서는 사실상 무의미하다.

국가가 경제적 자원(상품, 투자, 신용)이나 정치적 자원(전략적 과잉 strategic surpluses, 군사적 우위, 외교적 제재)을 두고 국경을 넘어 경쟁을 벌일 경우, 이러한 재화들은 틀림없이 대립적이다. 마찬가지로 국가가 자국 시민들 또는 다른 나라 시민들의 빈곤을 해소하는 식량지원개발지원기술이전 제공에 실패할 경우, 틀림없이 이러한 재화에 대한 접근에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배제된다. 실제로 전지구적 공공재의 배후에 있는 선전 거품은 사유재 고유의 대립성과 배타성이라는 시장의 힘에 의해 부풀어 오르는데, 이는 대중을 위한 형평성중심의 재화가 아니라 이해당사자들의 이익을 위한 이윤중심의 재화이다. 각국 정부들은 [자국민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자원을 보호운영분배할 상호의존적 권력이나 정당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이를 위해 세워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전지구적 공공재의 자유주의 신화는 도처에 촉수를 뻗고 있다. 강한 국가주권, 국가 간 불간섭, 제한된 다자 협력이라는 현재의 시스템 하에서, 각 정부들은 전지구적 자원주권을 위한 대의적 토대를 확립하기를 거부한다. 민간부문과 공공부문 모두 세계의 집단행동 문제식량과 물에 대한 접근, 보편적 보건, 교육, 원조 및 테크놀로지 분배, 국경을 초월한 안전 및 안보, 세계평화, 정당한 법적정치적 시스템, 공해 없는 환경, 깨끗한 공기, 공정한 경제 시스템가 전지구적 공통재로서 관리될 수 있거나 관리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그러는 동안 국가의 사적/공적 성장을 향한 신자유주의적 몰두가 지구를 파괴하고 있으며 사람들을 이러한 집단적 자원을 빼앗긴 상태로, 지역권역전지구적 공통재의 본질적인 가치를 표현하거나 실현하지 못하는 상태로 방치하고 있다. 이제 전지구적 공통재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협의하고 조직해야할 공유되고 있는 자원들에 관한 모든 시민의 규범, 권리, 의무에 대해 합리적인 대화를 해야 할 때이다.

 

 

새로운 전지구적 사회계약을 맺기

 

모든 정치적 공동체에 뿌리내려져 있고 분포되어 있는 공통재 민주주의의 정당성 있는 형태를 위해서는 사회경제적 관계규칙제도의 중대한 재배치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공통재는 민주적인 전지구적 협치를 위한 법적제헌적 토대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러한 플랫폼을 제시할 때,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지역 공통재를 조직하고 지구시민으로서 자신의 주권을 선언해야 하며, 정부에 전 인류와 지구의 모든 생명체들이 갖고 있는 생득적 권리를 인정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세계 모든 사람들의 지구시민권 계약은 국가시스템 바깥에서 자기결정에 대한 지역적 요구의 목소리를 낼 민주적 수단을 제공함으로써, 수탁경영이는 의회적 협치 형태를 포함하면서 넘어선다을 창출할 자원공동체 및 시민사회단체에 권력을 부여할 것이다. 이를 통해 일국의 주권적 권한은 공통재 자원 지역 및 생태 지역의 측면에서 재협상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원 이용자들과 생산자/공급자들은 모든 중요한 공통의 재산에 대해 직접 결정을 내릴 것이며, 이를 미래 세대와 기존 세대 그리고 미래의 종과 기존의 종을 위해 유지하고 운영할 것이다. 모든 자원 영역은 독특하며 매우 많은 공통재들이 겹치기 때문에, 공통재 운영은 지역, 국가, 국가 간, 권역, 전지구적 이해당사자들의 논의를 통해 숙고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민주적인 공통재 제도는 서로 겹치는 동시에 독립적으로 협치의 모든 수준에서 작동할 것이다.

 

전지구적 협치의 전개는 분명 대단히 큰 과제이다. 주권국가의 토대가 완전히 다르게 정립되어야 한다. 사회적경제적 법률 및 제도에서 공통재를 위한 새로운 토대에 합의함으로써, 국가는 사유재의 지배적인 역할을 축소해야 할 것이며 자원에 접근하고 자원을 보존생산운영사용할 세계 모든 사람들의 권리의 도덕적정치적 정당성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는 공통재에 대한 세계 시민의 권리를 인정하는, 자원주권, 공유된 책임, 법적 책무에 대한 새로운 인식론의 개발을 의미한다. 공통적 소유, 사회헌장, 공통재 트러스트의 자기조직적참여적 시스템이 전지구적인 제헌적 협치에 주입되면, 이미 많은 국가에 존재하는 견제와 균형이 민주적인 공통재 제도의 대의적 의사결정과 정치적 평등의 보다 완벽한 표현을 발견할 것이다. 새로운 전지구적 경제 시스템과 그 사회계약은 기업의 요구나 국가 주권이 아니라 공통재에 대한 시민의 주권적 권리에 기초할 것이다.




  1. [옮긴이] private, public, common은 기본적으로 각각 ‘사적’, ‘공적’, ‘공통적’으로 옮겼다. 여기에 goods가 결합될 경우에는 사유재, 공공재, 공통재(원문에서는 commons와 common goods가 혼용됨)로, property가 결합될 경우에는 사적 소유, 공적 소유, 공통적 소유로(properties일 경우 구체명사로 간주해 ‘재산’으로 옮김), sector와 결합될 때는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으로 옮겼다. [본문으로]
  2. 이 글의 초점은 아니지만, 공통재와 공유자원(common-pool resources, CPRs)을 구별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공유자원은 오픈 액세스 체제를 수반하는데, 여기에는 자원을 운영하기 위한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다. 공유자원은 이를 다스리기 위한 권리나 규칙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누구든 아무렇게나 전유할 수 있다. 반면 공통재의 경우, 사람들은 공유되고 있는 자원을 운영하기 위해 스스로 기능적‧문화적 협의를 진행한다. 따라서 공통재는 공유자원 같은 오픈 액세스 체제에는 존재하지 않는, 격식 없는 규칙과 규범에 따라 운영되는 경향이 있다. [CPR이 이미 ‘공유자원’으로 번역되어서, ‘shared resources’는 CPR과 구별하기 위해 ‘공유되고 있는 자원’으로 옮겼다. - 옮긴이] [본문으로]
  3. 대립성‧배타성 개념에 대해서는 실케 헬프리히의 글을 참조하라. [http://en.wikipedia.org/wiki/Common-pool_resource - 옮긴이] [본문으로]
  4. 앞의 글. [본문으로]
  5. [옮긴이] Distributive Enterprise (DE). 혁신을 위한 개방적인 협력에 중점을 둔 사회적 기업. 부의 생산뿐만 아니라 분배 또한 촉진하는 경제 시스템을 창안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협력의 효율성을 통해 가치가 창출되는 ‘현명한 이기심’(enlightened self-interest)에 부합하는 기업 형태이다.(http://opensourceecology.org/wiki/Distributive_Enterprise) [본문으로]
  6. 국제개발 분야에서 일부 풀뿌리 활동가들이 이미 이러한 원칙을 따르고 있지만, 생산 및 협치의 대대적인 확산을 통한 커머닝[공통화] 실천은 아직 시민사회 전반으로 뻗어나가지 못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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