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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번커먼즈 세미나 @ 경의선 공유지 1회차 갈무리 본문

쓰다

어번커먼즈 세미나 @ 경의선 공유지 1회차 갈무리

은혜 Graco 2016. 8. 18. 16:10

교재 : 

Dellenbaugh, Mary, et al., eds. Urban Commons: Moving Beyond State and Market. Vol. 154. Birkhäuser, 2015 


1회차 텍스트

Markus Kip, Majken Bieniok, Mary Dellenbaugh, Agnes Katharina Mullei, Martin Schwegmann

   "Seizing the (Every)Day: Welcome to the Urban Commons!"

Brigitte Kratzwald

   "Urban Commons - Dissident Practices in Emancipatory Spaces"

Markus Kip

   "Moving Beyond the City: Conceptualizing Urban Commons from a Critical Urban Studies Perspective"



* 커먼즈는 (필자마다 사용하는 단어에 차이가 있지만) 3가지 층위를 갖는다.

- 커먼즈(commons; common resources; common goods)

- 커머너(commoners; communities) 

- 커머닝(commoning; institutions/institutionalising; rule)


* 번역의 문제

발제자를 비롯해 세미나 참여자 대부분이 '공유'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아무래도 익숙한 표현이고, 필자들이 선행연구로서 꼭 거쳐가는 오스트롬의 저작이 "공유의 비극~"으로 번역되었기 때문이지 싶다. 그러나 (1)현재 '공유경제'가 하나의 혁신적.대안적 수익창출 모델(에어비앤비, 우버, 소카 등)로 부상하고 있는 시점에서 '공유'라는 표현은 여러모로 위험요소가 많다. 단지 자본이 선점한 용어여서가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커먼즈-커머너-커머닝이 정치/경제/사회/문화라는 기능주의적 구분에 기초한 협의의 경제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공유'를 사용하게 되면, sharing과 commoning의 차이가 뭉개진다. sharing과 달리 commoning은 몫을 나누거나 좋은 것을 함께 즐기는 것 이상이다. commoning은 결정.자치.제도화.교육(연습과 경험)을 수반하는데, 영어의 sharing과 그것의 번역어인 '공유'는 이를 다 담아내지 못한다. 다시 한번, 커머닝은 협의의 경제나 문화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결정'을 동반하는 한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의 문제이며, '교육'을 동반하는 한 필연적으로 주체성의 생산/변형을 향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자율주의적 맑스주의 담론(aka. commonism)에서 the common이 '공통적인 것'으로 번역되는 것처럼 '공통재'(-공공재-사유재)로 번역해왔는데, 이것이 단지 사물뿐만 아니라 주체와 실천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음역(커먼즈, 커머너, 커머닝)이 여러모로 효과적일 것 같다. 세미나 교재의 제목처럼 자본과 국가(즉 근대)의 틀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가진 기분 좋은 낯섦을 밀어붙여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용어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조. <마그나카르타 선언>, 정남영 옮김, 갈무리, 10-11쪽. <자본의 코뮤니즘, 우리의 코뮤니즘>, 연구공간 L 엮음, 난장, 13-15쪽.) 


* 커머닝의 두 가지 양상

커머닝의 ing가 주는 능동적인 느낌 때문에 간과되고 있는 커머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능동적/적극적/유기체적/메이저 커머닝 vs. 수동적/소극적/바이러스적/마이너 커머닝. 전자는 '커머닝'이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가령 마을운동이나 협동조합 같은 '으쌰으쌰' '뚝딱뚝딱'의 이미지이다. 그러나 후자의 커머닝은 그것이 미치는 영향력에 비해 너무나 과소평가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부동산이다. 부동산 가치의 상승에서 지주의 기여는 제로에 가깝다. 지주가 누리는 시세차익은 상인과 종업원들의 노력, 가게 손님과 인근 주민(이들이 대부분도 주택세입자)의 왕래와 입소문에서 기인한다. 이렇게 바이러스적 혹은 분자적이어서 계량할 수 없는--그래서 경제학자들이 '외부요인'이라고 밖에 서술하지 못하는--이러한 다수의 공동의 생산행위까지 고려에 넣음으로써 커머닝의 외연을 넓힐 필요가 있다. 이는 특히 어번커머닝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도시라는 공간은 트래픽커뮤니케이션의 공간, 즉 횡단과 연결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 경계설정을 둘러싼 끊임없는 협의 ("constant boundary negotiation")

커먼즈-커머닝은 완결된 그 무엇이 아니라 과정이다. 그것은 커머너들의 협의와 결정을 통해 끊임없이 변모하며 언제든 새롭게 생성될 수 있다. 


* 전략적 닫힘과 존재론적 열림 ("strategic enclosures and ontological openness")

커먼즈-커머닝의 덕목이라 할 수 있는 이 두 가지 양상을 해당글의 필자는 '도시적인 것의 변증법'이라고 부르는데, 내 생각엔 뭔가가 지양됨으로써 가능하다기 보다는 서로 다른 층위에서 항상 공존하는 것(두 겹)으로 보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각각의 수식어가 이미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필자는 닫힘에 '전략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였고 닫힘은 '일시적'인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반대로 열림에는 '존재론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였고 '다를 수 있는 권리'("an inherent right to be different")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내가 보기에 전략적 닫힘은 실현가능성(feasibility)의 영역이고, 존재론적 열림은 자연상태(natural state)--어쩌면 커머너들은 인류의 자연상태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나 '백지'가 아니라 '커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일지도/이어야할런지도 모른다--의 영역이다. 르페브르에게 도시가 글로벌 네트워크의 한 마디였던 것처럼 커먼즈-커머너-커머닝 역시 도시라는 네트워크의 한 마디로서 존재하는데, 이 마디의 디폴트(존재론 또는 자연상태)는 on이고 상황에 따라 전략적/일시적으로 off 상태가 되는 것이다.  


* 다를 수 있는/다르게 될 권리 ("an inherent right to be different" 

'다르게 되기'에 선행되어야 할 것은 (1)'다르게 욕망하기'이다. 욕망의 회로를 재구성하는 것은 커머너들이 성취해야할 가장 중요한 커머닝 중 하나이자, 커머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수확이다.[각주:1] 덧붙여 또 하나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지금은 약화되어 잠복해있지만 우리의 역사 속에 존재했던 (2)잊혀진 커먼즈 전통들을 발굴해내는 일이다. 커먼즈 연구에는 역사학/계보학적 접근이 필요하다. 


* tragedy of 'taking for granted'

커머너들이 경계해야할 것은 이기심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tragedy of the commons를 패러디하자면, tragedy of 'taking for granted' 정도라고나 할까. 없어지고 나서야 혹은 없어지기 직전에 그 가치(물론 사용가치!)를 깨닫는 경우가 많다. 안타까운 건 복원하기 어려운 것일수록 더 그렇다는 점이다. 






  1. "저는 허위의식을 뒤집는 것이나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는 믿음이 아니라, 욕망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뭔가 다른 것을 원하는 것 말입니다. ... 소비주의가 갖는 문제는 그 조건에서는 욕망이 제대로 크지 못한다는 점이지요. 제 주변에는 울적하거나 심심하면 쇼핑을 간다는 친구들이 많이 있어요. 그것은 불쌍한 것이지 그릇된 것이 아닙니다. 그냥 불쌍한 거예요. 우리는 삶 속에서 더 크고 더 많은 욕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소비주의를 넘어서야 합니다. 그러니 당신의 아이팟을 사랑하세요. 저도 제 아이팟을 사랑합니다. 다만 더 많은 것들을 사랑하세요. 저는 지금 소비주의 비판이라는 전통의 무력함에, 허위의식을 문제 삼으며 징징대는 태도에 항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허위의식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한된 욕망이 문제이지요." (하트, <맑스 재장전>, 59-60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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