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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제5회 맑스꼬뮤날레 기본소득 세션 본문

쟁이다

[토론문] 제5회 맑스꼬뮤날레 기본소득 세션

은혜 Graco 2016. 4. 3. 19:34



심광현의 「기본소득, 노동(운동)과 문화(운동)의 선순환의 고리」에 대한 토론문




“나는 자본주의다. 나의 사회에서는 비경제적으로 생산적인 방식으로 

스스로를 표현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게으르다는 딱지를 붙인다.” 

@_Capitalism_ [각주:1]



   심광현의 「기본소득, 노동(운동)과 문화(운동)의 선순환의 고리」는 “한국사회는 IMF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발전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이 완성되는 가운데 자동화 기술의 기하급수적 가속화가 노동을 잠식하여 비정규직위 규모가 정규직을 능가하고,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심화시키면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을 심화하는 방향으로 달려 왔”으며, “이런 격랑에 대해 수세적 대응에 머물러 왔던 노동운동을 포함한 사회운동도 당장 “근본적인 이행”을 고민하지 않고서는 어떤 해법도 찾기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었다”는 현실 진단으로 시작한다.(3쪽) 그리고 저자는 이러한 진단 하에, “기본소득운동이 신자유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현실적이고도 공세적인 운동이 되기 위”한 두 가지 요건을 제시한다. 하나는 “그 결과가 국민경제 전체를 위축시키지 않고 지속 가능하게 하는 데에 긍정적으로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늘어난 자유시간이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이나 소비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자율적이고 연대적인 형태의 문화적 향유와 교통에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4쪽)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기본소득운동의 이 두 가지 요건은 일견 사뭇 다른 성격의 논의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관점 또는 원리는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오늘날 노동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한 축에는 국민경제의 지속가능성을, 다른 한 축에는 자유시간의 자율적․연대적 재구성을 놓는 것은 노동시간/자유시간, 노동/비노동, 생산/소비라는 구분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드러낸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저자는 이 분할을 노동과 문화라는 용어로 대체하며 양자의 선순환의 필요성을 역설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분할의 틀은 “<노동의 양과 무관한 소득에 대한 권리>와 <노동에 대한 권리> 사이의 <단절 없는 결합>”(9-10쪽)이라는 기본소득의 좌파적 재구성에서 반복되고 있다. 


   양자의 선순환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저자의 이러한 구분은 전통적인 근대적 이분법에 비해 상호배타성의 정도가 덜하다. 그러나 노동/문화에 대한 기존의 이항대립적 관념을 유지한 채 이루어지는 결합은 크고 오래된 ‘단절’을 이미 전제하고 있다. 여기서 던질 수 있는 질문은 과연 노동와 문화를 동등한 항으로서, 즉 동일한 층위에 있는 별도의 영역으로서 다루는 것이 타당한가이다. 기계적인 분할을 전제한 채 하나를 다른 하나에 덧대는 방식으로 오늘날의 노동과 문화의 관계를, 그리고 선순환이라는 기획을 충분히 그려낼 수 있는가 말이다. 


   저자가 천착하고 있는 주제(“기본소득운동을 매개로 한 노동운동과 문화운동의 새로운 연대”)는 각 운동부문들의 연대를 구축하고 강화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형태 forms of life를 뿌리내리기 위한 실험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특히 주체들이 삶의 운영에 관한 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네트워크와 제도적 장치들을 창안하는 것은 코뮤니즘으로의 이행의 핵심이다.[각주:2] 그러나 그러한 아이디어들은 노동과정 대 노동과정 외부라는 분할 속에 머물러 있다. 노동 내의 위계를 허물고 창조적 숙련노동에 대한 접근을 확대하는 것(노동과정의 재구성)과 자본주의적 소비를 자율적이고 연대적인 향유로 전환하는 것(노동과정 외부의 재구성)이 중요한 과제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보다 발본적인 선순환을 위해서는 그러한 분할의 틀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한다. 그동안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그러나 부의 생산에 기여해온 영역을 재조명해야하는 것이다. 


   저자의 용어로 바꿔 말하면, 이는 (창작․향유를 막론한) ‘문화’활동이 곧 노동임을 규명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인지적이고 정동적인 측면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는 오늘날의 생산의 조건[각주:3]에서, 노동과 문화의 결합은 별도의 독립된 영역들 간의 상호작용으로 축소될 수 없다. 그 결합은 오히려 생산과 재생산이 구별되지 않는 탈근대적 생산활동(마이클 하트와 안또니오 네그리의 용어를 빌자면 ‘삶정치적 생산 biopolitical production’)이라는 맥락 속에 배치되어야 한다. 자율주의적 맑스주의의 최근 논의(특히 하트와 네그리의 논의)에서 핵심개념으로 제출되고 있는 ‘공통적인 것 the common’과 관련지어본다면, 문화는 공통적인 것―생산의 원료 및 수단인 동시에 산물―이며, 오늘날의 노동은 ‘공통적인 것을 기반으로 공통적인 것을 생산하는 활동’ 자체로 재정의될 수 있다. 


   이는 ‘노동권’에 관한 논의와도 밀접하다. 저자의 주장의 이론적 배경이 되고 있는 앙드레 고르의 좌파적 보장소득론은 “<노동의 양과 무관한 소득에 대한 권리>와 <노동에 대한 권리> 사이의 <단절 없는 결합>”을 골자로 한다. 이때 노동에 대한 권리는 단순히 “노동할 권리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정규직 노동자와 이로부터 배제되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사회를 분열시키는 것을 거부”(9쪽)하는 것(가령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여기서 더 나아가 노동이라 불리지 못하는 (즉 교환가치화가 불가능한) 수많은 활동들이 부를 생산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비임금노동으로 분류되는 활동들에 대한 보수로서 기본소득을 요구하는 것이 ‘억지’나 ‘몽상’이 아님을 주장해야한다. “소득이 노동 그 자체로부터 독립해서는 안 되고 [단지] 노동시간으로부터 독립되어야한다”(10쪽)는 고르의 주장이 (그의 진의가 무엇이었는가와 관계없이) 오늘날 정치적 함의를 가지려면, ‘소득과 노동의 연동’이나 ‘노동에 대한 권리’에서의 노동은 고전적인 노동/비노동(소비․향유․재생산 등)의 분할을 넘어서야 한다.     


   노동권 문제는 이른바 ‘노동자성’ 문제로 연결된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출현 이후 계속, 그리고 ‘프레카리아트 precariat’나 ‘코그니타리아트 cognitariat’ 등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외연이 엄청나게 확장된 지금 더욱, 논쟁이 되고 있다. 어디까지 노동으로 볼 것인가. 아니, ‘어디까지’라는 한계 설정이 대체 가능하기는 한 건가. 얼마 전 영등포 집창촌 폐쇄로 시작된 성노동자들의 투쟁은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요구와 함께 ‘성노동자도 노동자다’[각주:4]라는 선언을 내걸고 있다. 이것은 성노동만이 처한 특수한 상황이 결코 아니다. 학생들의 수업노동, 예술가들의 예술노동, 주부들의 가사노동 등 인간의 삶의 질을 좌우하는 데 결정적인 생산활동들이 비노동으로 분류되고 있으며 그 생산자들은 그로부터 생산되는 부를 박탈당하고 있다. “기본소득운동이 신자유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현실적이고도 공세적인 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박탈당한 부를 재전유하기 위한 운동으로 기획되어야 하며, 그러한 작업은 ‘노동자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 없이는 불가능하다.


   ‘노동’ 또는 ‘노동자성’을 탈근대적 생산조건 속에서 새롭게 정의하고 나면, ‘노동중독증’(18-19쪽)이라는 관점은 무력해진다. 저자가 소개하고 있는 홀거 하이데의 노동중독증 개념은 불안․두려움․우울 등 정동의 차원을 다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욕망의 생산 주체를 자본으로 설정하고 욕망을 채우려는 움직임을 구조적으로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결핍을 채우려 하는 어리석은 움직임으로 환원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현실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오늘날의 ‘노동중독’은 ‘현혹’의 결과(사치 혹은 낭비)가 아니라, 지극히 실존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다. 극도의 불안정성 속에서 수업노동자는 훗날 안정적으로 고용되기 위해 수업노동/구직노동을 하고, 고용된 임금노동자는 정리해고 당하지 않기 위해서 임금노동을 하고, 가사노동자는 그 임금노동을 재생산하기 위해 가사노동을 하며, 예술노동자나 성노동자는 다른 노동자들에게 ‘감동’을 줌으로써 수입을 얻는다. 


   그 근원이 무엇이건 간에 노동을 ‘중독’으로 설명하는 것은 너무나 일면적이고 안일한 해석이다. 이는 불안정성에 짓눌린 소외된 노동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사태를 읽음으로써 그 속에서 일어나는 활력과 주체성의 생산을 간과하고 있으며, 따라서 활력 및 주체성의 생산이 갖는 집단적․사회적․네트워크적 성격 역시 탈각하고 있다.[각주:5] 생계를 위해 강제당하는 노동임에도 그 속에서 느끼는 성취감, 만족, 기쁨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그 속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끊임없이 상상하면서 그려내는 탈주선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노동과 욕망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다. 오늘날 노동을 인지적이고 정동적인 사회적 생산(혹은 삶정치적 생산) 그 자체로 재정의하는 순간, 그리고 생산활동의 기반과 산물이 공통적인 것임을 긍정하는 순간, 욕망은 개체적인 성격을 벗어던지며 무한성 콤플렉스에서 해방된다. 욕망의 무한성이 ‘죄악’으로 규정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한정된 자원’이라는 근대 정치경제학의 틀 속에서이다. 그 틀에서는 마치 ‘산 노동’이라는 존재론적 지평이 ‘생산적 노동’이라는 정치경제학적인 (그것도 근대 산업자본주의에 국한되는) 특정 범주에 억눌려 있듯이, 힘의 표현으로서의 욕망(‘하고자 함’)이 결핍으로서의 욕망에 억눌려 있다. 우리가 욕망을 허위의식으로 규정하고 무찔러야 한다면, 그것은 ‘무한’해서가 아니라 ‘결핍’(이데올로기에 의한 허구적 결핍이든, 실존적 결핍이든)으로서 사고되기 때문이다.


   노동과 욕망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작업은 기본소득의 ‘실현가능성’을 위해 제출되고 있는 노동유인/생산유인의 문제로 이어진다. 저자는 곽노완의 사회연대소득 모델을 기본소득의 실제적 상으로서 적극 수용하고 있으며, 따라서 두 사람에게 실현가능성이란 곧 “21세기 코뮌주의 분배원리는 도덕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자본주의보다 우월하며 따라서 지속가능하다는 것”(7쪽)을 의미한다. 지금 우리가 공장의 시대에 살고 있다면, 생산유인에 대한 논의는 현실적인 중요성을 띨 수도 있다. 산업생산이 헤게모니를 갖는 조건 속에서 기본소득에 의해 일종의 ‘도덕적 해이’가 발생한다면, 즉 기본소득만으로 소박한 생활을 영위하면서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에서 이탈하는 일이 속출한다면, 적절한 유인을 마련함으로써 노동과 욕망을 통제해야할지도 모른다.[각주:6]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오늘날의 생산조건은 노동과 욕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하며, 이 새로운 해석에 대한 생산주체들의 요구 또한 날로 커져만 가고 있다. 


   산 노동과 생산적 노동의 구분이 점점 흐려지고 있는 (그래서 부의 생산이 점점 측정불가능해지고 있는) 오늘날, 기존의 노동범주로부터의 탈주는 더 이상 ‘해이’나 ‘나태’가 아니며, 욕망은 더 이상 ‘결핍’이라는 유인을 통해 통제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 생산유인이 있다면 그것은 노동가치론에 대항하는 기본소득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논의의 출발점을 ‘기본소득이 도입되고 나면’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지금-여기로 돌려 오랫동안 우리를 결박해온 노동가치론을 어떻게 붕괴시킬 것인가를, 그리고 바로 그 속에서 노동운동과 문화운동이 어떻게 선순환을 이룰 수 있을까를 함께 모색해야할 것이다. 여기서 함께 뛰어보자.






  1. @_Capitalism_이라는 트위터 계정의 5월 27일자 트윗이다. “I am capitalism and in my society, creative people who like to express themselves in non-economically productive terms are labeled lazy.” [본문으로]
  2. 이는 금융위기 이후 서구에서 시작되어 북아프리카에서 중동으로, 그리고 다시 유럽 대륙으로 순환되고 있는 혁명의 물결에서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날로 심화되어 가는 불안정성에 대한 책임을 내핍이라는 이름으로 민중에게 전가하는 것에 대한 반발(“We won't pay for your crisis!”)이자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욕망이다. [본문으로]
  3. “임금관계는 생산이 삶정치적으로 일어나는―내구재뿐만 아니라 지식이나 정보 같은 비물질적 재화는 물론, 궁극적으로는 공통의 삶과 새로운 주체성이 생산되는―오늘날 붕괴되고 있다. 노동자들의 재생산에 필요한 가치를 생산하는 필요노동시간과 자본가에 의해 전유되는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잉여노동시간의 분할, 그리고 필요노동의 잉여노동에의 종속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중략) 이처럼 오늘날 자본은 점점 생산의 조직화의 외부에 있게 되고, 그만큼 생산은 자본으로부터 점점 자율적이 되어간다. 그래서 오늘날 자본이 행하는 공통적인 것의 전유는 착취라기보다 수탈에 가깝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날의 프롤레타리아트는 고용된 노동자가 아니라 공통적인 것의 생산에 참여하는 (고용된 노동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제 자본과의 적대는 더 많은 임금과 더 나은 노동조건을 요구하는 임금노동자들의 투쟁이 아니라, 공통적인 것의 재전유와 노동의 강제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하는 생산자들의 투쟁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기본소득이 주요한 투쟁의 장으로 부상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은혜,「삶정치적 기본소득을 위하여」,『진보평론』45호 참조. (http://imirreducible.tistory.com/121) [본문으로]
  4. http://twitpic.com/51ghlx [본문으로]
  5. 아이폰에 대한 욕망은 과연 애플이라는 기업의 배를 불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가. [본문으로]
  6. 이는 복지국가 모델이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것을 발생시킨 근본적인 힘은 도덕적 해이가 아니라 계급투쟁에 있지만 말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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